이틀째 비가 내렸습니다. 꽃이 활짝 피어 꽃구경으로 마음들이 들떠 있을 때 내리던 봄비는 해갈의 기쁨보다 아쉬움이 더 컸을 것 같습니다. 전국에 걸쳐 내린 상당량의 비에 화사하게 피어있던 꽃들이 삽시간에 져버리고, 봄비는 꽃비가 되어 바닥을 하얗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삼일만 더 날이 좋았더라면 맘껏 꽃구경들을 했을 거란 생각으로 아쉬움이 컸습니다.
그런데 꽃이 다 진 후 연초록 새잎들이 싱그러움을 한껏 자랑하는 이때 이렇게 때맞춰 내린 비는 생명을 돋우는 반가운 약비일 것입니다. 그냥 꽃인 것으로 보였던 나무에 꽃이 지자 비로소 고개를 내밀던 앙증스런 파아란 잎들이 꽃보다도 더 고와 보였습니다.
꽃 속에 묻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던 이파리들은 어쩌면 봄부터 가을까지 거느릴 자신들의 시간에 비해 꽃들의 시간은 너무 짧다는 데서 동정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자신들은 언제까지나 보조일 뿐이고, 꽃이 피고 그 꽃이 지면 맺힐 열매에 대한 최상의 배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나는 꽃보다도, 여리디 여린 이파리들에서 생명의 신비로움과 감격과 아름다움을 더 느끼곤 했습니다. 꽃은 화려하긴 하지만 생명감을 크게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리디 여리게 피어난 이파리들이 점점 푸르름을 더해 가며 조금씩 넓어지고 두꺼워 가는 것을 보면서 생명의 존재와 자연의 순리를 체감합니다.
헌데 사람들은 그런 자연의 질서를 보면서도 왜 자꾸만 그런 순리를 역행하려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이나 자연이나 질서를 따르는 것은 정한 이치인데 말입니다. 사람도 자연의 일부임을 자꾸만 부정하려 하고, 그 부정은 사람 외의 모든 것을 무시하거나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습니다.
새삼 피어나는 아름다움보다 떨어지는 것의 아름다움이 더 크게 감격적임을 느끼곤 합니다. 어제부터 내린 비로 이파리들이 얼마나 기분 좋아하는지 보이는가요. 풀이나 꽃이나 나무라고 어찌 특별히 기분 좋은 때가 없겠습니까. 온 몸을 간지럽히는 이런 비를 맞고 있으면 키도 줄기도 쑥쑥 신나게 자라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꽃이 졌기에 저 만큼 잎이 무성할 수 있음일 것 같습니다. 지금의 내가 있음은 분명 누군가 나를 위한 희생이 있었음일 것입니다. 꽃이 져야만 튼실한 잎도 열매도 가능한 것처럼요.
최원현/ 수필문학가. 칼럼니스트 http://essaykorea.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