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그림자
달그림자
최원현
nulsaem@hanmail.net
딸아이는 어머니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아직 젖을 달라고 보채는 아기에게 물릴 젖은 아기가 빨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아기도 젖을 물 수가 없나보다. 하지만 처음에 우유를 먹이게 되면 아예 모유를 먹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게 엄마가 된 딸아이의 주장이었다. 어떻게든 젖을 빨려보겠다고 했다. 그런 아이를 보는 마음이 저 삼십여 년 전으로 돌아가 가슴을 싸아하게 한다. 딸아이는 젖도 그렇다고 우유도 제대로 못 먹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이렇게 자라 엄마가 된 것이다.
다행히 딸아이에겐 전문 산후조리 도우미가 출산일로부터 와서 입원기간 내내 도와주었다. 또 자연분만으로 바로 퇴원하여 집으로 온 아기와 산모를 매일 아침 일찍부터 능숙한 솜씨로 돌봐주게 되니 아이도 이내 안정을 찾는 듯 했다. 하지만 제 어미를 닮아 딸아이도 역시 함몰 젖이란다. 그러니 아기도 엄마도 고생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젖이 모자랐던 제 어미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준비를 잘 한 덕에 그래도 쉽게 젖이 돌았고 양도 충분할 것 같다 하니 안심이 되었다.
딸아이는 어떻게든 아기가 편안히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쉽게 젖을 빨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맨살로 아기를 안는다. 산모라고 어찌 여자가 아니랴만 엄마가 되는 순간 어머니라는 이름 속에 여자는 잠겨버리고 만 것이다. 제 엄마는 같은 여자라지만 아빠도 있고 남편이 있는데도 아기를 위해서는 여자인 것을 접는 딸아이를 보며 숭고한 모성애와 생명의 신비를 새삼 다시 깨닫게 된다.
언젠가 시골 버스정류장에서 차를 기다리는데 삼십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아기 엄마가 간이의자에 앉아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처음엔 나도 부러 눈을 피해 주었는데 살짝 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젖을 물리고 있는 이 젊은 엄마와 아기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평화로워보였다. 그랬다. 그녀는 오직 어머니일 뿐이었다. 그에겐 다만 아기의 배가 고프면 안 된다는 한 생각뿐이었다. 햇볕이 저녁을 향하면서 많이 옅어지긴 했어도 아기의 이마엔 송알송알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아기 엄마도 이따금씩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훔쳐내고 있었다. 여자란 어머니가 되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 여성이 된다고 한다. 그런 것 같다.
달그림자란 말을 좋아한다. 어떤 물체가 달빛에 비치어 생기는 그림자, 물이나 거울 따위에 비친 달의 그림자를 달그림자라 하는데 햇빛에 의해 생긴 강한 그림자처럼 부시지 않고 부드럽게 느껴져 정감이 간다. 특히 물에 비친 달그림자는 더없이 맑고 정겹다.
아빠가 아이를 향해 베푸는 사랑을 햇빛 그림자라 한다면 아마도 은은하고 잔잔하게 주는 엄마의 사랑은 달빛 그림자 같을 것이다. 딸아이가 아기 젖을 먹이는 것을 보면서 달그림자를 생각한 것도 강렬한 모성애 보다는 잘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은은하여 오래도록 변함없이 주어지는 그런 사랑이었음 하는 바람일 것 같다. 한 손으로는 빨지 않는 젖을 만지면서 젖을 먹고 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며 이 나이에 이르러서도 ‘나는 그렇게 해보지 못했다’는 말을 생각해 낸 것도 내 기억 깊이 늘 아쉬움으로 남아 있었다는 증거일 것 같다.
딸아이는 제 엄마의 달그림자이고, 아기는 딸아이의 달그림자다. 그냥 비쳐진 그림자가 아니라 생명이 있는 그림자다. 없어져 버릴 그림자가 아니라 점점 형체가 살아나는 그림자다. 우리 삶도 그렇게 내 모습을 알게 모르게 새겨놓고 남기는 기록이다. 제 어미가 그리 했던 것처럼 딸아이가 그렇게 하고 있고, 아기도 자라면 어느 땐가 제 엄마가 한 것처럼 또 그렇게 할 것이다. 그렇고 보면 난 아쉬움이 더 커진다. 그리움으로만 남겨진 게 전부이기 때문이다.
지난 추석 성묘엔 부모님이 유난히 더 그리웠었다. 만지기만 해도 내 손자국이 남을 것만 같은 여린 생명체 아기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내 눈으로는 감지하지 못하는 아이의 자람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인다. 구부리고 자는 아기의 모습이 어릴 적 내 자던 모습 같기도 하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하늘의 섭리가 아니랴.
문득 어릴 적 시골 우물에 환한 얼굴로 내려와 웃고 있던 보름달의 달그림자가 꼭 지금 아가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월간 <책과인생> 2008. 9월
국제펜클럽 심의위원. 한국수필작가회 회장. 강남문인협회 부회장. 한국수필가협회․수필문학진흥회․수필문학가협회 이사. 한국수필․수필세계․건강과 생명 편집위원.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 수상.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살아있음은 눈부신 아름다움입니다>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 <숨어있는 향기> <서서 흐르는 강> <기다림의 꽃> <문학에게 길을 묻다> 외 nulsae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