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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등단작품 - 책방 나들이, 발뒤꿈치

늘샘 2010. 7. 13.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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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12월09일 00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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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 나들이

[《한국수필》1987년 가을호 초회 및 1989년 봄호 추천 완료 작품] 

책방 나들이

최원현    

나는 이따금 헌 책방엘 들른다. 꼭 무슨 책을 사야겠다는 생각에서만은 아니다. 무심결에 들르게 되는 습관적 나들이라고나 해야 할까?

▲ 최원현 수필가
어떤 때는 마음에 드는 책이 한 권도 없어 그냥 빈손으로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때는 하던 일을 미처 못 끝내고 나온 것 같은 개운치 못한 마음이 된다. 그래서 살만한 책이 정히 없으면 아이들 몫으로라도 한 권쯤 골라 사 가지고 나온다. 그렇다고 새 책방에는 안 가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기회만 되면 책방을 찾는다. 친구와 만날 약속도 다방의 매캐한 담배 연기 속보다는 책방에서 시간을 맞추곤 한다. 그러나 헌 책방에서처럼 마음이 가볍진 않다. 호화로운 표지와 손이라도 벨 것 같은 새 것에서 풍기는 섬뜩함도 그렇고, 그렇게 만지기만 하고 안   사고 나오면 야단이라도 맞을 것 같아 눈치가 보이기도 한다.

헌 책방은 다르다. 모든 책이 손때 묻은 내 책 같게만 여겨진다. 이 책 저 책을 마구 빼어보고 뒤적여도 불안함 같은 게 전혀 없다. 헌 책이 주는 허름함이 오히려 마음을 편케 해 준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헌 책방의 매력은 절판된 책을 구할 수 있다는데 있지 않을까. 

구할 수 없을 줄 알았다 구하게 되었을 때의 감격은 헌 책방에서만 얻을 수 있는 기쁨이다. 뿐 아니라 계속 중판이 되어 나오는 책이라도 초판본엔 유난히 정이 가기 마련이다. 책들은 대개 누렇게 변색이 되어 있거나 빛이 바래 있기 마련이지만 새 책에서보다도 오래된 그런 초판본에 나는 더 애착을 느끼곤 한다.

나는 고서 수집가가 아니다. 새 책 한 권 값이면 넉넉히 두세 권을 살 수 있다는 경제적 이점도 취하고, 또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는 구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하는 곳이기에 나는 희망을 얻어가기 위해서도 헌 책방에 들른다.

요즘에도 수필집과 시집 몇 권을 얻었다. 모두 초판본으로 나온 지 십 년이 넘은 것들인데 개중엔 이십 년이 넘은 것도 있다.

맨 뒷장을 살그머니 열고 발행된 날짜를 확인한다. 그리고 앞쪽으로 되돌아와 조심스레 첫 장을 연다. 그러면 처음으로 출판된 자신의 첫 작품집을 가슴에 안고 두렵고 떨리는 감격으로 방망이질치는 저자의 가슴, 그 고동소리가 들려온다. 그 흥분이 나의 것이 되어 희열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나 헌 책방에선 울적한 기분이 될 때도 있다. 친필 헌사를 하여 증정한 책이 잉크도 마르기 전에 헌 책방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마치 나의 책인 양 얼굴이 화끈거리고 그렇게 해버린 사람이 못내 원망스러워진다. 

순간, 내가 지금까지 사서 선물한 책들도 그렇게 됐을 것만 같고, 내가 내는 수필집도 그렇게 될 것만 같아 안타까워진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차라리 잘 된 일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보아주는 이도 없이 책장 귀퉁이나 바닥에 쳐 박혀 먼지 범벅의 천덕꾸러기로 남는 것보다는 이렇게 헌 책방에라도 나오게 됨으로서 오히려 진실로 원하는 사람에게 갈 수 있다면 훨씬 다행스런 일이 아닌가.

헌 책방엔 대개 일 주일 간격으로 들른다. 대개 그 정도에서 새로운 책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복권을 사서 한 주일을 기대 속에 산다지만 나는 어떤 책을 만나게 될까 하는 기대로 한 주일을 보내는 셈이다.

내가 사는 동네엔 두 곳의 헌 책방이 있다. 나는 시간이 나면 자전거를 타고 혹시 또 다른 책방이 있나 찾아보지만 아직은 두 곳의 책방으로 만족하고 있다.
내 방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노라면 내가 그 책을 빼내왔던 헌 책방이 눈앞에 펼쳐진다. 남들이 잘 안 보는 곳을 주로 찾는 나의 눈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수줍듯 인사하던 책들. 

'쟝 그르니에'의 <섬>을 만난 것도 헌 책방이었고, 내가 즐겨 읽는 몇 권의 시집과 수필집도 헌 책방에서 구했던 것들이다.

나는 헌 책방을 사랑한다. 책방 가득한 온갖 세상 냄새가 좋고, 그들에게 묻어있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그들이 품고 온 희로애락의 삶들을 사랑한다.

그들의 아픔, 슬픔, 고통은 곧 우리 삶의 맛이요, 냄새가 아닌가. 비록 한 때 주인을 잘못 만나 떠돌이 신세가 되긴 했지만 어쩌면 그로 인하여 참으로 아껴주는 새 주인을 만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새것이 좋긴 하겠지만 헌 것과 묵은 것은 무조건 좋지 못하다는 생각, 오늘날의 우리는 조금만 오래되어도 너무 쉽게 고물 취급을 해 버린다. 하지만 어찌 오래되었다고 다 못 쓰는 것이며, 낡았다고 다 버릴 것뿐이랴. 지쳐온 세월만큼 쪼그라지고 말라붙어 버린 어머니의 가슴보다 이 세상에 더 넓고 편안한 곳이 어디 또 있던가.

낮 동안 그저 즐겁게만 뛰어 놀던 아이도 어둠이 몰려오면 엄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듯, 우리가 돌아갈 곳도 다가오는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버린 추억 속의 세계일 것만 같다. 그렇기에 옛 것에 더 깊은 연민과 애정을 느끼면서도 억지로 자꾸만 부정하려 드는 것은 아닐까.

하기야 버려지고 버리는 것이 어찌 책뿐이랴. 당장에 소용되지 않는다고 이내 내다버리고, 필요해지면 또 새 것을 쉽게 사는 우리의 생활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의 위험한 장난 같지 않은가.

고무신 한 켤레로 두 해를 나면 나중엔 신기료 아저씨의 솜씨만 덕지덕지 남던 우리의 어린 날, 그 때엔 버린다는 것을 얻는다는 것보다도 더 어렵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문물이 풍요로워지고, 생각도 바뀌어 가고 있는데 어찌 옛 생각만을 옳다 할 수 있으랴.

나는 찢어지고 떨어진 책들을 붙이고 손보아서 말짱하게 만들었을 때 더 큰 애정을 느낀다. 장정이 떨어진 아이들의 책도 내 손이 가면 새 책처럼 변화한다.
우리 삶도 어떤 면에선 한 권의 책으로 비유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어떤 책일까. 새 책일 때도 사랑 받고, 오래 되어 낡고 헐어서도 떨어진 한 장 한 장을 정성 들여 붙이면서 두고두고 읽힐 수 있는 그런 한 권의 책을 소망함은 나의 지나친 욕심이 될까.

바쁜 일이 겹쳐 얼마 동안 찾지 못했던 헌 책방을 내일은 들러야겠다. 어쩌면 생각지도 않게 반가운 손님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많은 책들 속에서 마음에 드는 귀한 책 한 권을 찾았을 때의 기쁨만큼 나의 삶 또한 그리 되도록 나를 가꾸고 싶다.

각양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 어쩌면 헌 책방은 그런 사람들의 소리와 냄새와 색깔을 모아 놓은 잘 차린 삶의 한 상(床)은 아닐까.

보이지 않는 부엌에서 묵묵히 일만 하시던 우리 어머니들처럼 기다림을 지키며 분수를 소중히 여기는 헌 책방의 책들.

나이가 들어갈수록 오히려 쪼그라지고 말라버린 어머니의 볼품없는 까만 젖꼭지가 더 그립고 소중해 지는 것처럼 나도 그런 한 권의 책이 되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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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1989년 봄호 추천 완료
  심사위원 : 趙敬姬· 徐廷範· 李喆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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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뒤꿈치

아내가 어디서인지 봉숭아꽃과 이파리를 한 웅쿰 가져왔다. 아이들은 봉숭아물을 들여 준다는 제 엄마의 말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서로 먼저 하겠노라 수선들을 떤다. 약국에 가서 백반을 사 오고 싸맬 비닐 종이며 묶을 실을 준비하고 꽃잎을 으깨기 시작했다. 금새 방안이 상큼한 봉숭아 내음으로 가득 찬다.

봉숭아꽃으로 손톱에 물을 들이는 풍속은 백여 년 전부터 성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각지에 봉숭아가 퍼진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이란다. 

고려 충선왕 때 왕이 원나라에 가 있던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소녀가 가야금을 뜯는데 줄을 뜯는 열 손가락마다 피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잠을 깨었으나 마음이 스산했다. 해서 궁궐 뜰을 거닐게 되었는데 열 손가락을 하얀 헝겊으로 동여맨 눈 먼 궁녀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고려에서 공녀(貢女)로 붙들려 왔는데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너무 자주 울다 보니 눈이 멀어 버렸으며, 손가락은 봉숭아물을 들이는 중이라 했다. 

자신의 눈으로 볼 수도 없는 손가락에 물을 들이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녀는 자신의 충정을 가야금 곡조로 바쳤는데 왕은 크게 감동하였다고 한다. 

그 후 고려에 돌아온 충선왕은 사람을 보내어 그녀를 찾아오도록 했지만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왕은 그녀를 생각하며 궁궐 뜰에 봉숭아를 심게 하여 그녀의 넋을 위로케 했는데, 그 때부터 봉숭아가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조실부모한 나는 시골의 외조부모님 슬하에서 자랐다. 딸만 셋을 두신 외조부모님께선 사위 복도 없으셨는지 맏딸과 맏사위를 먼저 보내는 아픔을 겪으셔야 했다. 거기에 둘째 딸까지 출가시킨 데다 막내딸마저 혼사 날짜를 받아 놨으니 허전함이 오죽 크셨겠는가. 해서 일손도 하나 늘릴 겸 큰집의 공허함을 조금이라도 메꿔 보자고 계집애 하날 데려왔다. 이름이 연실이었다. 그때 내 나이는 일곱 살이었고, 연실인 나보다 두 세살 위였던 것 같다. 막내 이모가 시집을 가버린 집에서 연실이는 이모의 자리를 그런 대로 잘 메꿔 주었다. 

우린 오누이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이듬해 나는 학교에 들어갔고, 내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집에 와서 연실에게 가르쳐 주면 그녀는 나보다도 훨씬 더 잘 알아버렸다.

그 해 여름이었다.
마당가에 심은 봉숭아꽃이 유난히도 아름답던 어느 날, 연실인 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여 주겠다고 했다. 나는 남자가 창피하게 무슨 봉숭아물을 다 들이느냐고 펄쩍 뛰었지만, 빨갛게 물든 예쁜 자기 손톱을 보여 주며 내게도 들여주마고 성화였다. 나는 그런 그녀를 피해 숨바꼭질 아닌 숨바꼭질을 했다. 허나 그날 밤 내가 잠이 든 사이에 연실인 내 양쪽 새끼손가락 손톱에 빨간 봉숭아물을 들여놓고야 말았고, 다음 날 나는 학교에서 온종일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어 버렸다.

울면서 집에 돌아온 나는 연실의 방에 뛰어 들어 그녀가 아끼는 반짇고리를 힘껏 내동댕이쳐 버렸다. 놀라서 뒤따라 들어온 그녀의 눈이 물동이만큼 커졌다. 그녀가 울음보를 터뜨렸다. 자기는 다만 내 손톱도 그렇게 예쁘게 해 주고 싶었다고 했다. 더 이상 화풀이를 할 수는 없었다.

다음 해 봄, 우리 집을 새로 짓게 되었다. 십 리가 넘던 등교길이 반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그녀가 더 신이 나 했다. 꿀벌처럼 부지런히 일꾼들의 새참과 점심을 날랐다. 

상량이 올랐다. 그런데 그처럼 좋아하던 연실이 보이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순간 불길한 생각이 들어 나의 발은 어느덧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기 방에 누워 있었는데 온 몸이 펄펄 끓는 듯 열이 올랐고, 자꾸만 발뒤꿈치가 아프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죽을 것이라고 했다. 발뒤꿈치가 아프면 죽는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어쩌면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자신만이 아는 죽음에 이르는 병을 끝내 내색조차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받아들이는 영악스러움은 어디서부터 생겨난 것이었을까? 꼭이 발뒤꿈치가 아파 죽은 것은 아니련만, 나는 그녀의 죽음으로 인하여 새 신발을 사서 발뒤꿈치가 벗겨져 아프기만 해도 죽은 연실이가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아 발뒤꿈치의 공포에 사로잡히곤 했다. 

발뒤꿈치가 아프면 정말 죽는 걸까? 죽음의 신은 발뒤꿈치를 잡고 끌어 가는 것일까? 사람은 태어날 때는 머리부터 나오는데 죽을 때는 발뒤꿈치부터 끌려가는 것일까? 나는 동네서 사람이 죽게 되면 죽기 전에 발뒤꿈치가 아프다고 했었느냐고 할머니께 묻곤 했다.

삼십 년도 넘게 지난 일이지만 지금도 봉숭아만 보면 곱디고운 연실의 마음과 항시 잃지 않던 맑은 웃음이 그녀의 넋이 되어 꽃으로 피어난 듯 싶다. 그래 한참 보고있노라면 꽃 속에서 연실이 성큼 튀어나와 내 손을 붙잡고 다시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겠다고 나설 것만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한 번 맺어진 인연은 그림자처럼 떨쳐 버릴 수 없는 것일까? 연실이는 내게 그리움과 외로움의 작은 파문을 던지고 갔다. 그 연실을 생각케 하는 봉숭아꽃을 한 움큼 가져온 아내. 아내는 아이들에게 봉숭아물을 다 들이고는 꽃잎이 조금 남는다고 이젠 내게까지 손가락을 내밀란다.

새끼손가락 손톱 위에 백반 섞은 봉숭아꽃잎을 얹으니 시릿한 감촉이 아릿아릿 전해 오고 꽃 내음이 더욱 짙다. 비닐종이로 돌돌 싸고 실로 칭칭 감는데 아이가 켠 라디오에서 가야금 산조가 흘러나온다. 문득 원나라에 붙들려 가 가야금을 타던 궁녀 생각이 떠오르며 어린 날의 향수가 가슴 가득 밀려온다.

바람이 인다. 마당가의 봉숭아 꽃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떨어진 꽃잎들이 순간 수천의 작은 연실의 모습이 되어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다. 연실인 봉숭아꽃 요정이었을까? 

내 손톱에 든 봉숭아물은 연실의 고운 마음의 색깔이 아닐까? 봉숭아물을 들이고 나니 이상스럽게도 내 발뒤꿈치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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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1987년 가을호 초회 추천
 심사위원 : 趙敬姬· 徐廷範· 李喆鎬

 
최원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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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B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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