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현]
허세욱 수필의 주요 메시지
수필집『임대 마차』는 허세욱의 60대 삶을 한 장의 도화지 위에 그려놓은 인생화이다. 1995년부터 2001년까지 7년 동안 발표했던 작품들을 모은 수필집인데 작가는 머리말에서 '물러서서 뒤돌아보는 나이임에도 또 한 번 둥지를 옮기고 그것도 시골 아파트를 빌려 살면서도 그를 달리는 마차로 생각하는 넋두리인 것이다. 아직도 유랑은 계속될 것이다." 라고 말한다. 삶을 계속되는 유랑으로 보는 허세욱은 고희(古稀)를 바라보는 이 즈음에 25년 이상을 살았던 역삼동을 떠나 수지(水枝) 신도시의 아파트로 세 들어 삶터를 옮겼는데 바라보이는 산을 황소로 보고 아파트를 마차로 보는 것 같은 신선한 시각으로 삶을 열며 수필을 빚는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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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스스로를 방랑벽이 있는 사람이라고 평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는 좀처럼 한 곳에 머물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주 이사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이란 말이다. 구름처럼 흐르며 사는 사람, 그에게 머무름은 새로운 움직임을 향한 숨 고름이었다.
그가 이번에 펴낸 수필집『임대 마차』는 그의 수필 및 문학 인생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한다. 40편을 3부로 나누었는데 '마지막 그리움 - 마무리 - 새로운 유랑과 추억'으로 생애 후반부 수필문학을 집중하여 삶의 새로운 조명이 되게 한다.
그는 1부 '임대마차'에 교수라는 현직에서 퇴임하여 자연인의 새로운 유랑기에 쓴 수필 12편과 계간 《에세이 문학》에 2000년 봄부터 4회에 걸쳐 연재했던 자전적 회상수필 <서동시절> 4편을 싣고 있으며, 2부 '감나무 면회기'에는 정년퇴임을 앞두고 교수와 연구를 마무리하던 기간에 쓴 수필 13편을, 3부 '닭 다섯 마리'에는 1995년과 96년에 발표했던 주로 고향을 그리는 마음의 수필 11편을 싣고 있다.
허세욱 수필의 주요 강점은 이야기가 있되 선이 굵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굵고 강함이 독자의 가슴에 파고들 때는 때로 아주 굵은 주사바늘처럼 아프고 투박하게 찔러오기도 하고, 떨림으로 전해오는 감동에선 너무 굵은 연 실로 띄우는 연이 되어 공중의 연의 상태나 기류가 오히려 세미하게 전달되지 못하는 손해를 보기도 한다.
그것은 허세욱의 수필이 호방하면서도 온유한 성격의 그가 살아온 삶 만큼 거짓말 못하는 어린애의 순진한 대답처럼 서사적으로 표현되고, 어릴 적부터 싹터온 강한 호기심과 적극적 삶에의 용기가 그의 성정만큼이나 깊고 강하게 수필 속에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허세욱 수필은 시인이요, 중국문학의 권위자답게 문체가 아름답고, 내용 속엔 사상적 깊이와 무게가 넉넉하며 독특하다. 자칫 딱딱해버릴 수도 있을 지적 풍부함과 깊이가 서정성을 품은 시적 상징적 언어로 리듬감을 주면서 입체감을 갖게 함으로써 문장이 색체와 선, 원근법과 음양이 선명한 한 폭의 수채화처럼 명쾌해 지게 한다.
허세욱 수필의 주요 제재는 고향과 천륜, 자연과 무위이다. 그것들을 그리워하고 순응하는 것을 숙명이요 신앙처럼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서 허세욱의 문학은 그러한 숙명적 순응과 결합으로 고향이란 제재의 산실을 통해 그만의 신앙을 확립하는 것이다.
부모에 대한 뜨거운 정과 고향에 대한 향수는 고희를 바라보는 지금에 와서도 여전하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생성되는 삶의 변화를 진실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되 유년시절의 가난한 체험까지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솔직성은 허세욱 문학의 진미이다.
살펴보기
1.수필집『임대 마차』를 통해 본 허세욱의 인생 여정
허세욱은 수필가로써 중문학자요, 시인이다. 필자는 모 수필 전문지의 청탁으로 역삼동으로 허세욱을 탐방한 적이 있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 동안 그의 수필보다도 그의 문학보다도 그의 인품에 사정없이 끌리던 것을 기억한다. 그만큼 친화력이 있고, 사람을 끄는 흡인력이 있었다. 대단히 부지런한 사람, 흐트러짐 하나 없이 참으로 성실하고 견고한 삶을 사는 교육자요 작가였다.
앞에서도 얘기했듯 허세욱 수필의 주요 주제는 고향과 천륜, 자연과 무위요, 그것들을 그리워하고 순응하는 숙명적 순응과 결합을 통해 그의 삶을 얘기한다.
허세욱은 삶을 마라톤으로 보되 철저하게 고독한 레이스로 보다는 42.195km의 막막한 길을 오직 자기만의 능력으로 달려야 하는 마라톤과 같은 것이 인생이지만 둘 또는 셋, 더 많은 경쟁자와 엎치락뒤치락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함께 목표를 향해 달리는 완주자여야 한다고 보고있다.
'그 처음과 끝이 철저하게 고독한 레이스라서 관심을 더했던 것이다. 그리고 레이스의 면면이 우리 인생의 성패와 애환이 엎치락뒤치락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마당과 자못 방불해서 말이다.'
―〈완주자를 위해〉p 198
완주자는 고독하다. 먼저 자기와의 싸움이다. 그러나 인간은 한계적 상황을 참 많이 만난다. 특히 마라톤의 레이스에선 햇빛, 바람, 비 등 예기치 않은 자연현상도 그 한계적 상황을 만드는데 크게 작용한다. 그것을 극복해야만 하는 완주자에게 잠재되어 있는 어떤 신앙적 힘은 엄청난 도움의 손길이 된다. 허세욱에게서 그것은 고향이다. 그가 고향 가는 열차를 그리워하는 것도 밖에서 볼 때는 너무나 평온한 여행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작가에게는 말할 수 없이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레이스가 될 수 있는데 허세욱은 신앙과도 같은 잠재된 힘을 '고향'에서 얻곤 하는 것이다.
'아내와 딸들의 손을 잡고 고향 가는 열차에 올라 칙칙폭폭 저녁 연기 모락모락하는 마을로 달리고 싶다. 어차피 딸들은 누구의 아내가 되어 내 곁을 떠날 것이요, 밤낮 없이 붙어살던 우리 내외 또한 언제인가 별 수 없이 따로 따로 갈 텐데, 옛날 젊었을 적 약속 없이 어느 다방에서 환한 웃음으로 해후하듯 어느 산자락 환히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마당바위쯤 기약할 수 없을까? 그것이 나 같은 필부로선 남들이 간구하는 영생 같은 것인데'
―〈둥지〉 p 234
그가 소망하는 저녁 연기 모락모락 나는 마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작가 자신으로 대표되는 현대인의 상실된 마음, 뿌리 내리지 못하고 그저 좋다는 것만 찾아서 물결치는 대로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고 흘러가는 이 시대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런 현대인들에게 고향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다. 어차피 삶은 유랑이요 여행인 것, 내가 낳은 딸들도 누군가의 아내가 되어 떠날 것이고, 영원히 같이 하자고 했지만 어느 땐가는 아내와 나도 따로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을 것인데 제발 그렇게 욕심껏 달려만 가지 말고 사는 날 동안의 구원으로 고향을 가슴안에 담으라고 한다.
그런 그의 마음은 고국을 떠나있을 때엔 더욱 더 그랬다.
'멀고 먼 낯선 나라일수록 더욱 그랬다. 비행기를 타고 이 땅의 끝임에도 그 꿈속에선 황소마냥 달려오는 까만 쇳덩어리와 하얀 김을 뿜으면서 몰아쉬는 한숨소리, 그리고 무명 베 포장 사이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주막집 안개들이 보이는 것이다. 한 때 먼 나라 꿈자리에선 내 고향 사랑방 아궁이에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이 보였는데. 고향역을 불현듯 그리는 버릇은 어쩌면 내 가슴에 맨 처음 바람이 들던 곳을 애써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 <유랑의 기점> p137-138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다른 나라에 갔을 땐 꿈에까지 나타날 만큼 그와 함께 해 주는데 허세욱에게 있어서 고향은 바로 어머니로 통하고 있음이다. 허세욱의 <서동시절>을 읽어보면 그는 아주 여성적인데 그런 성격이 더 그를 어머니와 고향에 늘 마음을 두게 하는 것 같다.
'나는 디딜방아의 역사를 좋아했다. 본래 숫기가 없던 탓으로 안 일 돕기를 좋아했다. 어머니 옆에서 부엌에 솔잎 지피기나 여름날 대청 안반에다 국수 밀기. 가을날 이른 아침 대청에서 홑이불을 다림질할 때 그 한쪽 귀퉁이를 잡아당기는 일 같은 잔챙이 일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아내 따라 장보기나 설거지를 나로서는 무관해 하지 않는 셈이다.
― <서동시절> '서적굴 디딜방아' p66
어머니 옆에서 여자아이처럼 어머니 돕기를 더 좋아하던 어린 날의 허세욱, 지금도 아내의 장보기나 설거지에 나서는 그의 여성적임은 그가 고희를 바라보는 지금까지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음이 그냥 고향이 아니라 바로 늘 어머니와 함께 하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그 그리움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움이 진하게 배어있다. 그것은 자기만이 알게 숨겨놓은 슬픔 같은 것이었다. 그는 말한다.
'이제사 알 것만 같다. 제사를 모시고 자식을 기르는 일이 끝내 디딜방아를 찧고 가슴을 치는 일일 줄이야. 그리고 눈 개인 저녁 노을에 파랗게 피어나는 안개 속에 '쿵 쿵 쿵더쿵' 하는 방아소리조차 슬픔인 것을 알았다.'
― <서동시절> '서적굴 디딜방아' p70
제사를 모시고, 자식을 기르는 것은 어쩌면 모두 어머니의 몫이다. 혼자서 그 일을 해 내시는 어머니를 보며 그저 좋아서라기보다는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움이 무언가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를 돕고자 함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의 다른 수필집 수필에서도 그는 이러한 고향과 어머니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 그래도 나에겐 고향이 있다. 그런데 어머님 내심에 움직이고 있는 고향의 소재(所在)처럼 나도 고향의 소재가 안개처럼 몽롱해지고 더러는 어머님의 소재를 따라 옮겨지고 있다. '
― <움직이는 고향> 중
나이가 들어간다 해도 고향과 어머니에 대한 향수는 변하지 않을 것 같고, 사람에게 그러한 향수가 살아있기에 순수를 잃지 않는 것일 게다. 정감있는 수필은 바로 그런 순수의 정서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수필가 김시헌은 이런 허세욱의 수필을 두고 '문장과 사상과 정서가 따로 있지 않고 하나가 되어서, 샘물이 되고 계곡물이 되고 시냇물이 되어 졸졸 쏴쏴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라고 평했다. 바로 허세욱의 그러한 면을 두고 한 평일 것 같다.
2. 자연적인 것을 중시하는 마음
허세욱 수필의 또 하나 큰 흐름은 자연적인 것을 중시하는 마음이다. 그것은 그가 고향과 어머니를 인생 내내 품고 사는 것과 유관하다. 허세욱에게 '고향-어머니-자연'은 '물'의 변화 속성 곧 액체의 물, 고체의 물, 기체의 물과도 같은 것이다.
― 제3부에 실려있는 수필 <우산>을 보자.
'과학의 힘은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정도로 첨단을 치닫고 있다. 그럼에도 비를 막거나 비를 피하는 일에는 속수무책이다. 별수 없이 종이나 비닐로 만든 우산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
―〈우산〉p 237 위
'비오는 날의 우산은 우리들의 옷만을 젖지 않도록 보호하는 게 아니었다. 그 우산 속의 마음을 따뜻하게 연결시키는 그러한 조화를 부렸다. 우산살 밖으로 뚝뚝 빗방울이 떨어질 때 두 사람의 어깨는 저절로 뜨거워졌고, 우산 밖으로 바람이 시끄러울 때 우산 속의 두 사람은 얼른 동병상련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오다가다 한 우산 속에 만난 낯선 사람 사이라도 그 간격은 부부만큼 밀착되었었다.
―〈우산〉p 237 중간
' 한 우산 속에서 이 하늘과 땅의 풍우를 함께 한 것은 분명히 소중한 인연이요 아름다운 만남이다. 비록 낯선 사람끼리의 우연한 잠시라지만 그 인연은 심상치 않은 것이요, 비록 마음과 몸을 함께 나눈 사이일지라도 풍우 속을 한 배에 탄 체험이야 그리 흔한 것이 아니었다.'
― <우산> p 239
'그토록 바람이 소리치고, 장대비가 내린 곳에서 마음을 덥혔던 곳인데 말이다.'
― <우산> p240
자연 현상인 비 내림, 그런데 허세욱은 '우산'을 통해 가슴에 담고 있던 참으로 많은 말을 하고 만다. 인간은 세상에 못 할 일이 없을 만큼 능력자라고 자부한다. 그러나 자연현상 앞에서는 하찮은 종이나 비닐우산만도 못할 때가 있다. 여기서 과학만능의 허를 말하면서 마라톤의 레이스에서 고향의 힘, 어머니의 힘을 의지하는 것처럼 '우산'도 그런 고향 내지는 어머니의 이미지로 살아난다. 뿐 아니라 우산은 또 어쩔 수 없이 비비며 함께 살아야 할 우리 삶의 세상으로도 의미된다. 비를 피하기 위해 내가 들어가건, 남이 들어오건 그 잠시의 동반자는 바로 우리 삶의 반려자, 친구, 가족, 동료일 수 있고, 한 시대를 함께 하는 우리 모두일 수도 있다.
그런데 허세욱은 '우산'을 통해 물질 만능, 과학 만능의 시대에 사는 우리가 순간순간 돌아가야 할 곳, 들어가야 할 곳이 우산이지만 그것은 아주 영원히 돌아가고 들어가야 할 연어의 모천 회귀 같은 마침표의 한시적 과정임을 암시하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게 한다.
여하튼 이러한 것들 모두가 고향과 어머니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한 정서는 그의 <서동시절>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면 부연 그믐달이 신록의 회화 나무 가지를 데리고 하얀 영창 그 쓸쓸한 창살에 절반쯤 걸려 있었다.'
― <서동시절> '로봇 글읽기' p70
'눈물에 범벅된 진달래 꽃잎을 따서 혀끝에 대면 꽃술에서 달콤한 진을 느꼈다. 그걸 한 잎 두 잎 손바닥에 접는 동안 난데없이 두보와 나 사이에 동병상련도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두보는 마흔 여섯, 나는 열 여덟, 그는 안록산 난리에 쫓기면서도 고향 땅에 갇힌 신세렸다. 그는 꽃을 보면서 저 멀리 훌쩍 떠나서 타향을 동경했다.'
― <서동시절> '꽃이 눈물을 뿌리고' p85
자연을 보는 그의 눈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따스한 아랫목을 연상케 하는 정의 끈이 느껴진다. 하얀 영창 쓸쓸한 창살에 절반쯤만 걸려 있는 것,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는 것,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일어나는 것, 그것들은 우리 일상의 아주 자연스러운 것들이지만 늘 은연중 가슴 한쪽에 아지 못할 아쉬움 같은 것을 남기곤 한다.
그는 방랑벽이라고 했지만, 두보는 난리에 쫒기면서도 고향 땅에 갇힌 신세였고 자신은 훌쩍 떠나 타향을 동경한다고 했다. 그는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러한 방랑벽을 두려워하며 어머니가 있는 고향에 정말 편안하게 안주하고 싶은 것은 아녔을까. 허세욱에겐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 자연이고, 그 자연은 정신적 고향이 되고 있다. 그래서 학교도 지식을 전달하는 직장으로가 아니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주길 바란다.
'이 캠퍼스를 오가며 이 캠퍼스가 다만 글을 가르치고 글을 읽는 직장 이상의 것임을 발견하곤 가슴조차 뜨거워지는 것을 체험했었다.'
―〈꽃 벙그러지는 소리가〉p 249
'나는 우리 학생들이 목련 피는 시각을 모르고 진달래의 고함소리를 듣지 못하고 뻐꾸기나 소쩍새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어서 부아가 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것말고도 간여할 일이 많은 줄 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 전원이나 목가와 너무너무 멀다는 것도 잘 안다. 다만 그런 풍경과 그런 일에 마음을 두지 않을 뿐이다. 자연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자기 집 안방 앞의 백년 매화나무 그 꽃 피는 시간이나 열매 맺는 시간을 알 턱이 없다. 마음으로 꽃을 보는 사람에겐 꽃 벙그러지는 소리조차 들리기 마련이다.'
―〈꽃 벙그러지는 소리가〉p 250
캠퍼스에 피어있는 꽃과 나무들, 마음으로만 보면 꽃 벙그러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대학 교수 허세욱이 안타까워하는 것은 바로 가르치고 배우는 일 또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목련 피는 시각, 진달래의 고함소리, 소쩍새 소리, 매화나무 꽃피는 시각, 매화 열매 맺는 시각, 우리가 마음을 주지 않고 생각해 주지도 않는다더라도 그것들은 아주 정확하게 진행되어진다. 허세욱은 그런 것에 무심함을 안타까워한다. 현란한 네온사인 불빛에 하늘의 별과 달을 빼앗겨버리고 사는 현대인의 슬픔을 대신하여 앓고 있다.
그의 자연을 중시하는 마음은 수필 <미꾸라지>에서도 나타난다.
'그 아름답기로는 어렸을 적 도랑 속의 그것들을 훨씬 능가했다. 나는 슬그머니 팔뚝을 걷고 실례를 했다. 후드득 물살 치며 도망치다가 내 손바닥에 잡힌 놈을 놓칠세라 불끈 장악했다. 미끈하기는 옛날의 그 감촉이나 미찬가지였지만 왠지 그 녀석들은 다소곳했다. 힘없이 항복할 뿐 옛날 그 앙칼진 요동을 느낄 수 없었다. 물을 옮긴 탓이리라.'
― <미꾸라지> p 132
'그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신나게 고리를 치고 그 텁텁하고 미끈한 흙물을 마시면서 길다란 부레를 움찔거리고 있다.'
― <미꾸라지> p133
사람을 위한다는 것, 곧 과학이나 지식을 배우는 일이나, 영양을 취하는 것이나 여행을 하는 것이나를 막론하고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을 100퍼센트 만족하게 해 줄 수 없는데 그 채워지지 않는 부분을 채우려 인간은 '고향-어머니'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이고, 허세욱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을 중시하는 마음도 결국은 고향-어머니로 귀결되는 것이다. 본향 만큼 소중한 곳도 없으리라. 좋은 환경에서 안주하고 살기를 수 십년이어도 가슴 한 부분이 비어있는 것 같은 현실, 대개의 사람들이 그걸 무시하고 살지만 허세욱은 그렇지 못한다. 미꾸라지의 앙칼진 요동,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신나게 꼬리를 치느 미꾸라지, 좋아보이는 것이 꼭 좋은 것이 아니라고 안타까움 가득 말하고 있다.
3. 그리움과 여행
인생이란 그리움의 삶이요 여행의 삶이다. 허세욱은 그리움을 '여행'이란 수단을 통해 채우고자 한다. 그런데 채우면서 더러는 숨기기도 한다. 채우지 못하는 부분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채울 수 있는 부분을 숨기기 함으로 채움과 숨기기는 동격이 되게 하고 그는 구실을 얻어 여행을 하면서 흥분과 해방감을 느낀다.
'그러니까 여행이 즐거운 것은 어딘가 꽁꽁 묶이었다가 풀리는 흥분이요, 날마다 똑같은 궤도를 달렸던 그 지루함에서 잠이 벗어나 흥분과 해방감 때문일 것이다.'
― <여행론> p121
그러나 그런 흥분과 해방감도 잠시 또 다른 구속을 느낀다. 전대와 트렁크의 구속이다. 전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절대적 힘이다. 트렁크는 우리에게 꼭 있어야 될 꼭 필요로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그게 사실은 구속이 된다는 것이다. 짐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덤처럼 생각했던 집을 떠나갔지만 이제부터 허리에 찬 전대에 묶이고 트렁크의 무게에 짓눌려야 했다. 해방과 함께 또 다른 구속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 <여행론> p121
이것이 인생이다. 그래서 그는 생각한다. 여행이란 잠자리의 자리 옮김 같은 것이라고.
'그냥 잠자리가 이 고랑에 앉았다가 저 고랑으로 넘나들 듯 가볍게 날개를 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방랑이라 하지 않는가?'
― <여행론> p122
또 하나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는 것이다. 차라리 불편하고 외로울 지라도 혼자서 가는 여행, 그러나 마음에 맞는 한 사람과 동행하고 싶어하는 허세욱의 숨겨놓은 마음, 허세욱은 그렇게 숨기기를 통해 더 절실하고 강하게 자기의 생각을 독자에게 전한다.
'좀 불편하고 외로울지라도 혼자서 가는 여행이 제일이요, 많아도 마음이 맞는 사람 딱 한 사람과 도란도란 낯선 곳을 떠도는 여행이라야 한다.'
― <여행론> p122
이처럼 대부분의 수필들이 고향이나 자연을 소재로 하였으나 비인간화 되어가고 있는 현대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이나 고발의 의미가 담겨 있고, 그것들은 시에서의 낯설게 하기처럼 시치미를 떼는 것 같으면서 할 말은 다 하는 독특한 기법을 쓰고 있다. 이것은 허세욱의 수필 정신이요 수필작법이기도 하다. 직접 대놓고 말은 하지 않으면서도 가슴 가득 더 많은 관심과 염려를 담고있는 그의 사랑법, 그의 수필은 그런 그의 마음과 정신의 표출이다.
그는 수필집의 제목이 되고 있는 수필 <임대마차>를 통해 인간이 얼마나 착각 속에 살고 있는가를 말한다.
'글세 내 눈앞에 잡힐 듯 보이는 저 누워있는 황소를 나의 소유로 망상한 것이다. 곧 내가 사랑하면 나의 편이요, 곧 내가 이름하면 나의 소유라는 사고 때문이다.'
― <임대 마차> p15
'이제사 타관살이에 이골이 났고, 이 세상 과객으로 그만치 관록이 붙은 것이다. 더구나 빌려 산다는 것, 그것이 빚으로만 생각되지 않는 것은 나도 누구에게 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다.(중략)
우리가 소유했거나 임대하고 매매하는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태어나면서 이 땅을 빌려서 벌인 사건들에 지나지 않는다.'
― <임대 마차> p16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라지만 착각과 망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또한 세상에 사는 동안 소유했다고 하는 것 모두가 다 빌려서 쓰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고희를 바라보는 그의 이러한 깨달음은 인간은 자연의 아주 작은 일부임을 인식케 한다.
가장 큰 고향은 자연이고 그 다음이 어머니고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는 허세욱의 생각은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명시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나가기
허세욱은 수필은 '정의 미학'으로 정(情). 사(事). 이(理) 곧 서정성. 서사성. 설리성을 수필의 3요소라 하고 있다. 수필의 情은 사람의 살이고, 理(지성)는 뼈고, 事는 힘줄인 것이니 이 情.事.理는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칠지언정 적당하게 삼각관계를 지녀야 하는 것이며, 이 세 가지의 균형이 문학작품의 성공이요, 수필의 성공이 된다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자칫 범문학적이 되어 수필의 전문성을 잃을 염려도 안고 있다. 그러나 허세욱이 말하는 서정/서사/설리성은 우리 수필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또 수필의 맛과 품격을 상승시킬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한다. 정의 미학을 수필속에서 실천하는 허세욱, 그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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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연적인 것에 대해 끊임없이 관심과 애정을 갖고 독자로 하여금 가까이 다가오도록 애쓰는 그의 긴장은 한 해에 300명이 넘게 배출되는 작금의 수필문단에 얼마나 큰 목소리로 와 닿는가.
고희를 앞에 두고도 마차에 올라 새로운 모험과 새로운 여행을 찾아 떠나는 허세욱의 삶, 수필 여행은 마치 말끔히 사건을 해결하고 저녁노을을 받으며 또 다른 미지의 새로운 곳을 향해 떠나는 옛 서부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기대와 도전을 갖게 한다. 역삼동의 큰집보다 지금의 임대마차가 편안한 안주와 방랑벽을 함께 충족하는 아름다운 기회가 되길 기대해 본다. 그의 삶 여행 곧 문학이 더욱 향기 나는 여행이 되길 바란다. 임대마차를 타고 느긋하게 저녁 놀 지는 시골길을 돌아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마을을 찾아드는 모습이 풍경화 한 폭으로 그려진다.
■ 최원현
문학평론가. 한국수필작가회 회장
[격월간《수필과비평》2002년 7/8월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