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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시) 가족사진 / 상가에 모인 구두들 - 유홍준

늘샘 2011. 6. 7. 20:25

유홍준, 「가족사진」 낭송 신동옥
 


유홍준, 「가족사진」


아버지 내게 화분을 들리고 벌을 세운다 이놈의 새끼 화분을 내리면 죽을 줄 알아라 두 눈을 부라린다 내 머리 위의 화분에 어머니 조루를 들고 물을 뿌린다 화분 속의 넝쿨이 식은땀을 흘리며 자란다 푸른 이파리가 자란다 나는 챙이 커다란 화분모자 벗을 수 없는, 벗겨지지 않는 화분모자를 쓴다 바람 앞에 턱끈을 매는 모자처럼 화분 속의 뿌리가 내 얼굴을 얽어맨다 나는 푸른 화분모자를 쓰고 결혼을 한다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넝쿨을 뚝 뚝 분지른다 넝쿨을 잘라 새 화분에다 심는다 새 화분을 아내의 머리 위에 씌운다 두 아이의 머리 위에도 덮어씌운다 우리는 화분을 들고 사진관에 간다 자 웃어요 화분들, 찰칵 사진사가 셔터를 누른다


시_ 유홍준 - 1962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났으며, 1998년 『시와반시』 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나는, 웃는다』 등이 있음. 윤동주문학상, 시작문학상 등을 수상함.
낭송_ 신동옥 - 시인. 2001년 『시와반시』 신인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가 있음.
출전_ 『상가에 모인 구두들』(실천문학사)
음악_ 배기수
애니메이션_ 정정화
프로듀서_ 김태형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면서 자란 자식은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그 아버지를 닮는다고 합니다. '화분'은 바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물림되는 내면화된 폭력과 그 상처일 것입니다. 그 화분에서 자라는 화초는 발육도 좋아서 무럭무럭 자라 "챙이 커다란 화분모자, 벗겨지지 않는 화분모자"가 됩니다. 이 화초는 무의식에 깊이 뿌리 박혀 보이지 않게 자라다가 행복한 가족사진을 찍던 어느 날 갑자기 보였겠죠. 이미 눈과 코처럼 몸의 일부가 된 화분 모자를 어떻게 벗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시에서는 이 폭력과 상처가 화분 놀이를 위한 즐거운 재료가 됩니다. 시에는 어떤 괴로움도 허구의 상상력에 녹여 즐거움으로 제련시키는 힘이 있답니다.   - 문 학 집 배 원김 기 택

 

 

 

 

 

喪家에 모인 구두들

- 유홍준

 

저녁 喪家(상가)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亡者(망자)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

저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장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북천)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 해설 - 이승훈

상가에 모인 구두들은 슬픔을 모르고 애도를 모르고 비탄을 모른다. 어떻게 알겠는가? 구두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구두는 사람을 표상한다. 구두와 장갑이 다른 이유이다. 물론 구두나 장갑이 신체기관을 넣는 도구이다. 그러나 장갑이 사람을 표상하는 건 아니고 구두가 표상한다. 특히 이 구두는 남성을 표상하고 장화는 더욱 그렇고 군용 장화는 힘센 남성, 남성의 성기를 표상한다. 장화를 신은 여성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고무신을 신은 여성은 여성답지만 장화를 신은 여성은 여성답지 않고, 내가 지금 유홍준의 시를 해설하면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모양이다. 사실 나는 지금 피로하다. 그러나 구두가 어떻게 알겠는가? 구두는 말이 없고 귀도 없지만 모이면 싸운다. 왜냐하면 구두가 인간이고 상가에 모인 구두들도 인간이고 이런 구두들은 또 싸운다. 왜냐하면 죽음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두가 인간이다. 신던 주인이 죽으면 구두도 따라 죽기 때문에 이 구두는 싸울 필요가 없고 주인이 떠나면 북천에 신발자리 별이 생기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상가에 모인 구두들이 이젠 조용했으면 좋겠다. 돼지고기 삶는 상가의 밤.

출처 : 예향한국
글쓴이 : 김태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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