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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어떤 숲의 전설 - 최원현

늘샘 2016. 4. 23. 11:07

어떤 숲의 전설

 

최원현

nulsaem@hanmail.net

 

그날은 우리 모두가 움직이는 나무였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누가 그렇게 하자고 선동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날 우리 다섯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훌훌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쏟아지는 장대비를 온 몸으로 받으며 칠흑의 소나무숲속으로 뛰어 들어 갔었다.

눈으로 코로 마구 흘러드는 빗물 속에서 향긋한 솔 향이 맡아졌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어두운대도 소나무들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까만 소나무가 어둠과 까망은 다르다는 듯 부딪히지 않게 우리의 눈을 이끌어 주었다.

그렇게 마구 달리길 한참, 숲이 끝났다. 그런데도 우린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미리 약속을 한 것도 누가 어디로 가자고도 안 했지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았다. 가속도 상태로 밭으로 뛰어들며 밭고랑 하나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손에 잡히는 고구마줄기를 헤치고 비에 젖어 부드럽게 도톰한 둔덕 깊이 손을 박았다. 흙 속에서 만져지는 딱딱하지만은 않은 감촉, 우린 어둠 속에서도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렇게 몇 개씩 수확한 고구마를 손에 들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비는 더욱 드세졌다. “너네들 나 빼놓고 우리 집 고구마 서리하자고 음모 꾸몄지?”우리 중 하나가 말을 했다. 우린 그걸 듣는 둥 마는 둥 달리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웃음소리는 빗소리에 잦아들고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다.

소나무 숲, 우린 이 숲에서 자랐고 놀았다. 학교가 끝난 후엔 무수한 갈퀴질로 빨갛게 살점이 보이도록 솔가리를 긁어내었지만 한 번도 미안하단 마음조차 가져보지 않은 우린데도 미워하거나 원망도 안 했다. 오늘의 유혹도 숲이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숲을 핑계 삼아 했던 일이다. 소나무 하나하나가 어디에 어떻게 서있는지를 보지 않아도 다 아는 그런 숲이다.

흙투성이가 되었던 우리 몸도 어느새 깨끗해진 것이 느껴졌다. 쏟아지는 빗속을 달리면서 빗물에 고구마를 씻어 한입 베어 물었다. 빗물과 함께 고구마가 한입 가득 베어졌다. 달큰했다. 아삭아삭 씹히는 아직은 여린 고구마 맛보다 빗속을 달리는 숨 가쁨에 호흡이 가빠져 삼키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럼에도 어둠 속을 달리는 작은 짐승처럼 입으로는 씹으면서 코로는 숨을 쉬면서 발로는 달리는 절묘한 행각을 잘도 해냈다.

집이 가까워졌다. 우린 발소리를 죽였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맨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비에 젖은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따스한 느낌마저 들었다. 숲이 그대로 가슴에 안겨왔다. 아니다. 숲의 가슴에 우리가 안겼다. 언제나처럼 그는 너른 가슴으로 말없이 우릴 받아주었다. 솔잎에 떨어졌다가 다시 떨어지는 빗줄기가 몸을 간지렀다. 헌데 그것만이 아니었다. 옆의 B가 그 순간에도 솔잎으로 간지럼을 태운 것이었다. 맨발로 달릴 때도 느꼈지만 빗물에 젖은 땅에 앉으니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나는 길게 드러누웠다. 이십 분도 채 안 되었을 빗속의 질주였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도 그런 짓을 했다는 것도 유쾌 상쾌 통쾌했다. 온몸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손으로 만져보며 나도 어느새 한 그루 소나무가 되어있는 것을 깨달았다.

드러누우니 빗물이 눈으로 코로 입으로 마구 떨어졌다. 눈을 감아도 코로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손을 뻗쳐 가까이의 나무를 만져봤다. 축축하게 젖은 나무가 한껏 부드럽다. 아니다. 살갗은 할머니의 손을 닮았다. 그때 푸드득 소리가 났다. 우린 너무나 놀라 후다닥 일어났다. 아마 잠자리를 훼방 당한 꿩이었을 게다.

그제야 나는 달려온 길을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냥 칠흑의 어둠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 속에서 소나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줄을 맞춰 걸어왔다가 제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둠과 까망이 구분되는 분명한 행진, 그러나 앞으로 더 나아오진 못 하는 것 같다. 소나무들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한 발 다시 뒤로 가듯 자기 자리를 지키며 흔들거리고 있었다. 순간 나는 친구의 손을 잡았다. 그도 아마 나처럼 와락 무서움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슬금슬금 뒷걸음을 쳤다. , 뒤에 있던 소나무와 부딪혔다. 앞으로 달릴 때는 부딪히지 않았는데 뒤로 가려다 부딪힌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가 소나무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몸을 돌리자 켜놓고 나온 등잔불이 창호지 창으로 흔들리며 빨리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우린 안방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깨실라 도둑고양이처럼 소리를 죽이며 방문을 열었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고 방바닥에 엎드렸다. 손에는 먹다 남은 고구마가 하나씩, 여기 저기 몸에는 긁힌 자국이 보인다. 닫힌 방문 밖에서잘 들어갔어?’소나무들이 아쉽다는 듯 합창으로 물어왔다. 서로를 쳐다봤다. 비에 씻겼다고는 해도 몸에는 솔잎도 붙어있고 풀잎도 붙어있다. 사람도 동물인 것, 그 본능엔 자연의 일부분이 되고 싶은 욕망이 있나보다.

반백년 전 우리만의 동화요 전설이다. 그 때의 그 숲은 지금도 그대로 있을까. 어린 날의 고향이 그립다. 그 숲이 그립다. 그 때의 동무들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은 한 명도 연락이 되지 않고 있는데 그들 또한 나처럼 어린 날의 전설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그 숲을 잊지 않고 있을까. 숲은 지금도 그렇게 그런 동화를 지어내고 있을까.

문득 다시 한 번 그 옛날의 어린 날로 돌아가 그 숲으로 달려가고 싶다. 그래서일까. 요즘도 비가 오는 날이면 가끔씩 그 때의 그 숲 생각이 난다. 코 속으로 스며들던 솔향에 빗물 머금은 날고구마 맛, 그렇게 어린 날의 동화는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사람의 숲에서 그 숲을 그리워하고 있다. 내 어린 날의 숲, 솔향 가득한 그 숲을.

월간 <수필과비평> 2016. 4월호

 

 

 

최원현 www.essaykorea.net

수필가. 문학평론가.한국수필로 수필, 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강남문인협회 회장. )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한국문인협회·)국제펜 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작가회 회장(역임),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월간문학상 수상. 수필집으로 <날마다 좋은 날><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문학에게 길을 묻다> 14권이 있으며, 1 국어교과서 및 중2 도덕교과서 및 여러 교재에 수필이 실렸음.

 

 

수필문장의 대표기법 : 은유와 환유

박양근

 

최원현의 <어떤 숲의 전설>

 

문학은 비유로 짜인 얼개이다. 비유로 이루어진 문학은 설명이 아니라 언어 속에 함축된 의미를 열거한다. 현실을 직접 보지 않고 언어를 통해 바라보고 해석은 정보가 아니라 사물이 지니고 있는 맛과 느낌을 나눈다. 이미지와 의미를 언어로 구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하는 집이라고 하였다. 언어는 존재를 풀이하고 존재는 언어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이라는 개념은 언어망이라는 말보다 더 구체적이다. 사물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기법이 비유이다. 비유 중에서 중요한 기법이 은유와 환유이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비유를 경시하는 것은 인간의 행위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경고하였고, 역사찰학자 지암비스타 비코는 은유와 환유는 언어와 문화가 어떻게 관련되는가를 보여준다고 하였다. 은유와 환유를 조심스럽게 선택하고 조직화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은유와 환유 사이에는 무시 못할 차이가 있다. 은유는 원관념을 보조관념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성의 순결을 나타내기 위하여 순결한 아름다움과 유사한 백합이라는 보조관념을 빌려와 백합같은 처녀로 표현한다. 은유는 세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내면적으로 이해시켜주는 것으로 사물이나 개념을 이해시키는 장치이므로 특정언어를 반복하는 어휘 체계를 중시하는 낭만주의 문학양식인 시에서 주로 사용된다.

환유는 사물이나 개념을 지칭하는 수단이다. 예를 들어 그는 왕이 되었다는 내용에서 왕이라는 단어 대신에 왕을 상징하는 왕관을 빌려와 그는 왕관을 썼다.“고 표현한다. 왕과 왕관 사이에는 인접성을 가진다. 환유는 대상의 속성을 설명해 주는 다른 말을 계속 구사하며 어떤 정체를 나타내려는 언어활동이다. 세상을 외면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해가므로 리얼리즘 장르인 산문이나 소설에서 주로 사용된다. 야콥슨은 낭만주의 예술은 은유적 성격이 강하고 리얼리즘 예술은 환유적 성격이 강하므로 시는 은유적이고 소설은 환유적이라 하였다.

이탈리아 기호학자 움베르트 에코는 은유와 환유는 상호 연관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은유(메타포)와 환유(미토노미)는 상호작용을 하므로 그 경계선이 모호해 진다고 하였다. 이것을 메타프토노미라고 부른다. 시적인 의미 체계와 소설적인 서사형식을 함께 지니는 수필에 은유와 환유를 도입하면 의미화와 형상화 사이의 유기성이 보다 강화된다. 무의미한 대상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수필에서는 은유와 환유간의 상호관계를 더욱 요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최원현의 <어떤 숲의 전설>은 어린 시절의 서사적 사건을 시적 분위기로 엮어낸 작품이다. 서사가 시적 비유에 실릴 경우 어떤 문학양식으로 변형하는가를 보여준 작품이기도 하다. 유년시절의 놀이를 글로 재생하는 경우, 사건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다큐나 신문기사 형식보다는 은유와 환유가 가미되는 동화나 판타지가 더 적절하다는 점이다, 그 점을 인지한 작가도 주인공과 행동과 배경을 설화구조에 맞추고 있다.

동화와 전설에서 배경은 다분히 고딕적인 기괴함과 신비성을 지닌다. 최원현이 설정한 배경은 비 내리는 심야의 소나무 숲이다. 의인법과 활유법, 은유와 환유가 뒤섞이면서 환상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숲은 단순히 나무들이 우거진 장소가 아니라 어린이들의 호기심과 동심을 자극한다.

등장인물에서도 사람과 사물 사이의 구별이 없어진다. 나무가 사람이 되고 사람이 나무가 되는 변신이 가능해진다. 사람이 자연을 따르고 자연이 사람을 받아들이는 생태적 소통도 이루어진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자연성을 체과한다.

 

그날은 우리 모두가 움직이는 나무였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누가 그렇게 하자고 선동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날 우리 다섯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훌훌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쏟아지는 장대비를 온몸으로 받으며 칠흑의 소나무 숲 속으로 뛰어들어 갔었다.

 

아이들이 옷을 벗은 맨몸으로 장대비가 내리는 숲 속으로 달린다. 밤의 달리기는 원시 시대로의 회귀이며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스트리킹이다. 성인이 된 작가는 지금 그러한 행동을 모방할 수 없지만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화자는 옷이라는 거추장스러운 굴레를 벗어버리고 자연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작가는 삭막한 현실을 벗어나 동심의 세계로 귀환한다. 환상의 타이머신에 올라탄 것이다. 그 벗음은 순수, 천진, 무욕, 자연, 생태, 동심을 뜻하는 장대비 속의 알몸이라는 언어와 만난다. “우리 모두가 움직이는 나무라는 은유가 나무와 어린이 사이의 유사성을 나타낸다면 옷을 벗어던진 알몸이라는 환유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소나무와의 인접성을 표현한다. 은유와 환유가 여기서는 동심이라는 개념을 공유하고 있다.

아이들이 꿈꾸는 세상은 놀고, 벗고. 먹는 장소이다. 솔 향과 까만 숲을 빠져나왔을 때 다다른 곳이 고구마 밭이다. 그들은 밭에 뛰어들어 고구마 서리를 한다. 이 놀이는 천진스러운 도둑질이지만 아이들이 함께 있는 즐거운 노동이기도 하다. 그들은 야식을 어른들로부터 얻으려하지 않고 서리일지라도 그들이 손으로 직접 이랑을 뒤집어 구구마를 찾는 행동을 선택한다. 숲과 고구마 밭은 작가가 자랐던 고향을 합의하는 환유의 언어들이다. 어린 시절의 고향을 표현하는 환유에 그 외에도 저수지, 뒷동산, 개울, 느티나무, 다락방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소나무 숲과 고구마 밭은 작가의 향수를 절절하게 표현해주는 정선된 단어들이다.

환유란 추상적인 느낌이 아니라 구체적인 감각을 전달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나의 어린 시절은 이랬다.“ 라는 현실감을 전달하려는 최원현은 유년기의 자신에게 가장 익숙했던 소나무 숲과 고구마를 선택한다. 리얼한 삶을 그려내는 수필이라면 더더욱 이런 선택이 필요하다.

시적 은유보다 서사적 환유를 더 빈번하게 사용된 소나무 숲은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속의 배경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공간이다. 그는 숲에서 놀았고 솔가지를 꺾어 방을 데웠고 고구마 서리로 군것질을 하였다. ‘ 보지 않아도 느끼는 숲이 아니라 보지 않아도 아는 숲이 되면서 환상적인 분위기와 경험이라는 리얼리즘을 함께 공유한다.

우리는 발소리를 줄였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맨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비에 젖은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따스한 느낌마저 들었다. 숲이 그대로 가슴에 안겨왔다. 아니다. 숲의 가슴에 우리가 안겼다. 맨발로 달릴 때도 느꼈지만 빗물에 젖은 땅에 앉으니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나는 길게 드러누웠다. 온몸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손으로 만져보며 나도 어느새 한 그루 소나무가 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땅바닥에 드러누운 작가는 나무와 하나가 된다. 소나무가 대지에 뿌리를 내리듯이 작가도 땅과 온몸으로 밀착하고 싶다. 빗물이 눈과 코로 떨어질수록 냉기보다는 행복감을 느낀다. 소나무와 동일한 종족이 됨으로써 비에 씻겨도 몸에 솔잎과 풀잎이 붙어 있는시절을 잊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나무가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런 감성이 일어나는 것은 성인이 지닌 독선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지켜보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순간을 나타낸다. 이것은 생태주의적 만남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최원현은 어른이다. 성인이므로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기록할 수는 있으나 환희가 넘쳤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한 추억은 꿈에서나 가능하므로 동화와 전설의 구조를 빌려와야 한다. 한여름 밤의 숲에서는 현실에 대한 절망을 이겨내고 사람도 동물인 것이라는 인식에 공감한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숲 속에서의 장난이 실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임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그 시절의 숲은 현재 무엇이 되어있는가

 

그 때의 그 숲은 지금도 그대로 있을까. 어린 날의 고향이 그립다. 그 숲이 그립다. 그때의 동무들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지금은 한 명도 연락이 되지 않고 있는데 그들 또한 나처럼 어린 날의 전설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그 숲을 잊지 않고 있을까. 숲은 그렇게 그런 동화를 지어내고 있을까.

 

고향의 일부였던 그 숲의 미래가 의문스럽다. 그대로 있는지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숲의 불투명한 미래는 역설적으로 동화와 전설의 무대로 되살아난다. 숲의 현실이 불분명하다는 사실은 환유이지만 고향을 그리워하는 심정은 은유가 된다.

최원현 수필의 좋은 점은 배경이 유년기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숲은 동심이 아닌, 보다 성숙한 세계를 나타나는 공간으로 바뀐다.

작가는 나는 사람의 숲에서 그 숲을 그리워하고 있다.” 고 말한다. ”사람의 숲에서 숲이 오늘이 우리들이 어울려 사는 사회를 의미하는 환유라면 그 숲은 동심을 나타내는 것은 환유이다. 은유(메타포)와 환유(미토노미)를 합친 메타프토노미라는 용어에서는 은유와 환유를 명료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는 은유와 환유가 겹쳐지는 메타프토노미를 바탕으로 <어떤 숲의 전설>을 어린이와 어른들이 함께 꿈꾸는 세계를 구현하였다.

문학은 언어가 지니고 있는 경계선을 무한대로 확장시켜 나가는 작업이다. 인간이 수행하는 연상은 무한대로 펼쳐지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작가마다 언어가 지니고 있는 무한성을 환장시킬 수 있는 능력에 차이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작가는 언어가 지니고 있는 한 가지 뜻이 아니라 그것이 내재하고 있는 법칙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그 법칙은 구별하면 유사성과 인접성으로 나누어지고 은유와 환유라는 비유법으로 구체화된다.

최원현은 한여름 밤의 소나무 숲이라는 언어로서 숲을 동심을 의미하는 은유와 어린 시절의 일화를 펼치는 서사체계를 이루어낸다.

문학이란 언어가 지닌 기존 의미에 저항하는 것이다. 어떤 말을 통해서 다른 말을 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은유와 환유의 기법을 적절하게 구사하면 은유와 환유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수필에서 감성과 서사의 유기성을 더 높일 수 있다.

문학이란 기존의 영역에서 의도적으로 일탈하는 행위이다. 일대일의 교환가치를 지닌 평상어는 인간이 지닌 표현 욕망을 충분하게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기존 언어 가치에 안주하려는 작가에게 던지는 경고의 깃발이 은유와 환유라고 하겠다. (박양근)

 


출처 : 솔샘문학회
글쓴이 : 늘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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