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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수필의 전범을 찾아서] 수필집 ≪서재여적≫의 성격과 수필문학사적 자리 - 오양호

늘샘 2016. 5. 9. 10:05

"≪서재여적≫의 문학사적 자리는 한국현대 수필문학사에서 수필이 여기의 문학이라는 사실과 또 한국의 수필형식은 문예수필과 문예론수필 두 형식이 기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자리에 있다. 이런 결론은 ≪서재여적≫의 수필이 당대 최고의 인문학 교수를 필진으로 한 사실, 그리고 형식적 권위로서의 교수가 아닌 문학과 문학연찬에 바친 한 문학 연구자로서의 수필의 개념, 한 문인으로서 수필이란 장르에 대한 글쓰기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수필의 전범을 찾아서  -  오양호
         -수필집 ≪서재여적≫의 성격과 수필문학사적 자리

 

 

 

   1. ≪서재여적書齋餘滴≫은 어떤 수필집인가


   대학교수 수필집 ≪서재여적書齋餘滴≫(경문사, 1958)은 한국전쟁 중에 출간되어 국제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김소운의 ≪마이동풍첩≫(고려서적, 1952) 이후 5년여 만에 처음 나온 귀한 수필 앤솔로지anthology이다. 그런데 이 수필집을 대하는 순간, 우리는 그 장정이며 글의 제목에서부터 1950년대의 우울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화려한 느낌’을 받는다.
   가령 ≪마이동풍첩≫ 속의 한 작품 <목근통신>은 일본의 ‘선데이 매일’이 한국전쟁에 종군한 미국 UP기자의 참전을 좌담기사로 다루며 ‘한국은 원래 빈한한 나라이고, 교활한 민족’이라는 기사를 싣자 김소운은 이렇게 따졌다. ‘한국과 일본을 비교할 때 과연 어느 쪽이 더 교활한 민족인지’ 살펴보자고. 또 1950년 11월 미국의 ‘뉴스위크’ 기자가 한국전을 취재하고 쓴 ‘한국인의 잔학한 행동’이란 표현에 대해 김소운은 그 이듬해에 ‘뉴스위크’지 편집장에게 <미지美紙에 항변-한국인은 잔인한가>1) 란 공개서한을 띄웠다. 이런 일로 이 문제는 한·일간, 한·미간의 국제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수필집 ≪마이동풍첩≫에 나타나는 1950년대 한국의 분위기다.
   그런데 ≪서재여적≫은 우선 운보雲甫 김기창金基昶의 벌 나비 나는 화사한 표지화에 월탄 박종화의 초서로 아우른 장정을 하고, ‘명문장가 대학교수 17인 집필’이란 속 표제까지 달았다. 전쟁을 치른 스산한 분위기를 느낄 수 없게 한다. 밝고 화려한 느낌이 강한 까닭이다. 그 삭막한 시절 글 잘 쓰는 교수 열일곱 사람의 글을 받아 호화 장정의 수필집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수필문학의 자랑거리다. 거기다가 ‘명문장가’에 ‘대학교수’ 열일곱이라니.
   그러나 이것은 외양이다. 이 수필집이 정작 시대정서와 많이 다른, 평화스럽고, 화사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 수필집의 첫 페이지를 펼치면 바로 발견하는 내용과 문체다. 한국수필문학사상 수필로 쓴 수필론, 밝고 단아한 피천득의 그 <수필>이란 명편이 이 수필집을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출현하는데, 그 <수필>이 마치 라일락 향기처럼 ≪서재여적≫ 전체를 감싸는 듯하기 때문이다.2)

 

   隨筆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隨筆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隨筆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부멘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住宅街에 있다.3)

 

   이 수필의 이런 문장은 고졸하나 화사하고, 평화롭다. ‘청자연적, 난, 학’이 주는 고졸함,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 풍기는 화사함, ‘가로수 늘어진 페부멘트’가 발산하는 걱정 없는 세상……, 이런 문맥은 한국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어느 도시 유족한 동네를 연상시킨다. 동양적 정일이 물씬 풍기는 동네 골목에 한 수려한 여인이 금방 들어설 것 같다. 수필의 특성이 화사하고 평화스러운 정경으로 표상되고 있다.
   이 수필집을 펼치는 독자는 이 수필의 이런 간결하면서도 탁월한 비유로 진술되는 글의 수사修辭에 압도당한다. 한국 수필문학사상 이만한 필진, 이만한 정성으로 장정된 합동수필집을 독자가 대하는 것 자체가 처음인데 그것도 첫 장을 열자 막바로 나타난 수필 한 편이 가위 누르듯 감정에 직핍直逼해 오기 때문이다.
   이런 글의 분위기는 이 작품이 불과 5년 전에 포성이 멎은 한국의 어느 장소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 하나의 비유이지 실재 어떤 장소에 대한 묘사는 아닌 까닭이다. 그러나 이 책이 출간되던 1958년의 한국은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 정거장>, <전선 야곡> 같은 유행가가 거리마다 흘러나오던 우울하고 스산하던 때였다. 그러나 글의 톤tone부터 그런 풍경과 다르다. 거리에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다 팔 잃고 다리 잃은 상이군인이 사회의 냉대에 배반감을 느껴 소위 그 땡깡4)을 부리고, 생활에 쫓겨 지친 사람들은 전쟁이 싸지르고 간 잿더미 위에서 삶의 터전을 다시 마련해야 하는 신산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지성의 대명사 대학교수, 그것도 유명 교수 열일곱 사람이 쓴 수필이 -수필이란 신변잡사가 글감이라는 사고가 팽배한 그 시절에 그런 시대상과는 아주 딴 세상의 이야기, 가령 ‘인생은 빈 술잔, 주단 깔지 않은 층계, 사월은 천치와 같이 중얼거리고 꽃 뿌리며 온다’5) 같은 우미한 수사로 글을 쓰고 있다.
   피천득 다음 필자의 글도 마찬가지다.

 

   ‘이슬을 받아 고운 뺨에 눈물을 머금은 듯한 연약한 양귀비꽃 조으는 듯 웃는 듯 웃는 양 부끄리는 희고 붉은 수련꽃…….’

-박종화, <사화단思花壇>

 

   ‘사랑은 겨울에 할 것이다.-겨울에도 눈 오는 밤에. 눈 오는 밤이어든 모름지기 사랑하는 이와 노변에 속삭이는 행복된 시간을 가져라.’

-양주동, <사랑은 눈 오는 밤에>

 

   둘째와 셋째 순위에 있는 글에서 한 대문씩 뽑은 것이다6). 이 글 역시 수사가 화려하다. 박종화의 꽃 이야기는 수식어가 겹쳐 있다. 미문을 쓰려는 안간힘이다. 양주동의 사랑도 정감이 넘치는 문장력이 감성을 자극한다.
   참혹한 난리를 겪은 상처가 이렇게 소거하는 공간에 ‘봄’ ‘꽃’ ‘사랑’ ‘우정’ 등의 테마가 책을 열면 차례로 나타난다. 그래서 화사하고, 평화스럽다.
   주검이 널브러졌던 전쟁의 흔적, 그리고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던 지식인의 외침은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보이지 않고, ‘명문장가 17인 집필’이라는 표제만 독자의 가독성加讀性을 자극하면서 달려든다.
   수필에 시대적 감각이 꼭 나타나야 된다는 논리는 없다. 그러나 문학의 수행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시대적 소명을 독자가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시대마다 수행해야 할 과제가 있기 마련인데 그러한 과제와는 아주 동떨어진 작가의 개성이나 취향 등을 즐겨 다룬다면 문학이 해야 할 최소한의 사명마저 유기하는 것이 된다. 특히 ≪서재여적≫ 같은 합동수필집의 경우 글 전부가 그렇다면 그건 문제가 된다. 만약, 수필은 그럴 수 있는 문학이라고 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수필이 제일 먼저 경계해야 할 예술적 한계다.
   수필이 임장성臨場性을 띤 글이라 함은 자질구레한 신변사의 미적 반응만이 아니라 현실에도 관심을 두는 창작행위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전쟁 후일담도, 그 시절 독재정치를 향해 내지르던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정치적 구호도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 길, 봄, 꽃, 사랑’ 등의 글감에 가려 보이지 않고, 정감 어린 테마가 화려한 문장과 호응을 이루면서 화사하고 정제된 세상에 정제된 존재들만 호출하고 있다.
   이런 글쓰기가 문예수필의 한 예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이의가 없다. 문예수필, 곧 미셀러니miscellany란 대개 신변잡사의 자성적 반응, 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 온아우미溫雅優美’7)한 삶의 표현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과 삶, 또는 그것을 다룬 기록, 문학에 대한 비판적 반응인 문예론수필critical essay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글쓰기는 수필의 전범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지금까지 논의한 사실에서 발견되는 우려는 이 수필집 초두의 몇 작품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 이 수필집의 성격과 수필사적 위상 전체를 규정할 자질은 못 된다. 이런 점은 ≪서재여적≫을 통독하면 드러나는 내용과 문체, 글의 발상이 문예수필보다 문예론수필 쪽이 더 많은 데서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다.
   수필을 발표하고 있는 교수의 이력 소개 또한 좀 별나다. 피천득(서울대), 박종화(성균관대), 양주동(연세대), 김성진(서울대 의대학장), 주요섭(신흥대 문리대학장), 유진오(고려대 총장), 이병도(서울대 대학원장), 이희승(서울대), 이양하(서울대 문리대학장서리), 손우성(성균관대 문리대학장), 조용만(고려대), 이헌구(이화대 문과대학장), 박종홍(서울대), 이하윤(서울대), 오화섭(연세대), 장익봉(성균관대), 권명수(연세대). 이렇게 17인이다.8)

   글을 쓴 사람의 중요한 인적 사항을 밝히는 것은 기본이다. 그런데 필자의 현 직책이 대학총장, 대학원장, 학장이라는 사실까지 명시하는 것은 문학적 이력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나 이 수필집의 성격과 위상이 어떠한가를 알리는 역할은 한다. 그래서 자신 있게 추천한다는 의미이고, 이런 필자의 근본과 직업이 이 수필집의 권위를 나타낸다는 말이기도 하다. 당시 한국의 종합대학은 양손으로 셀 만큼 적었다. 그런데 이 수필집은 서울의 큰 대학 유명 교수를 동원해서 합동수필집을 만들었다. 내세울 만하다. 결국 필진이 이렇게 화려하고, 높은 공부를 한 사람들이기에 이들이 쓰는 수필이야 말로 수필의 전범이 된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이 수필집의 이런 사실은 참고로 하면서, ≪서재여적≫ 수필집의 성격과 문학사적 자리를 작품을 통해 밝히기 위해 나는 다음과 같은 세 개의 문제점을 고찰하려 한다.
   첫째, 합동수필집을 내면서 전업문인(수필가)의 작품은 몇 편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대학교수들의 작품으로 수필집이 형성되어 있는 문제.
   둘째, 글의 실제 내용을 보면 문예수필miscellany과 문예론수필critical essay로 양대분되어 있는데 그 외양은 문예수필만 클로즈업 된 문제.
   셋째, 수필집을 묶으면서 ‘명문장가’란 제명題名을 달고 있는 문제.
그렇다면 이런 사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2. ≪서재여적≫의 필자 성격과 수필문학사적 자리


   ≪서재여적≫에 수필을 발표하고 있는 대학교수 중 당시 수필가로 알려진 사람은 이양하 이희승 정도이다. 이양하는 대학에서부터 19세기 영국수필을 전공한 사람으로 ≪이양하수필집≫(1947, 을유문화사)을 간행했고, 그의 <페이터의 산문>과 같은 수필로 이미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희승은 국어학 전공 교수지만 수필집 ≪벙어리 냉가슴≫(일조각, 1956)이 있다. 피천득은 전업 수필가라 할 만하지만 사실 그는 그때까지 단행본 수필집은 간행한 바 없는 시인 겸 수필가이다. 그는 1947년에 처녀 시집 ≪서정시집≫(상호출판사)을 간행했다. 이 시집은 청전 이상범이 장정을 한 전 64쪽 4·6판, 얇고 작지만 호화판인데 수필은 <어린 벗에게> 1편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시다. ≪서재여적≫을 간행한 다음 해인 1959년에 나온 ≪금아시문선≫(경문사)도 시가 53수, 영시 6수, 수필은 22편으로 시가 더 많고, 1969년의 ≪산호와 진주≫(일조각)도 시와 수필이 반반이다. 피천득의 최초의 수필집은 1976년에 범우사에서 간행한 ≪수필≫이 처음이다.
   다른 필자 중 문인은 시집 ≪흑방비곡≫과 소설 ≪금삼의 피≫의 저자 박종화, 소설 ≪창랑정기≫의 유진오,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주요섭, 평론가 이헌구, 시인 이하윤, 희곡작가 오화섭이 있다. 양주동은 문인이라기보다 영문학과 국문학, 한학에까지 조예가 깊은 교수다. 그는 ≪문주반생기≫란 재미있는 수필집이 있지만 그건 ≪서재여적≫에 수필을 발표한 그 이듬해에 나왔다.
   이렇게 볼 때 수필가는 두 사람, 그러나 두 사람의 본업은 교수이다. 수필집 제목을 ≪서재여적≫이라 한 것은 필자들의 이런 사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재여적≫의 ‘여적餘滴’이란 결국 ‘여기餘技’란 말이고, 따라서 ‘수필은 전문적인 글쓰기가 아니고 취미로 하는 글쓰기’라는 의미 이다.
   한국의 수필문학은 1940년대에 많은 단행본 수필집이 나오면서 번성하기 시작했다. 또 그 시기에는 한국현대수필문학 사상 주목할 만한 수필집이 집중적으로 출판되었다. 1938년에서 한국전쟁 때까지 출판된 다음과 같은 단행본 수필집이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9)


   朝鮮日報社 出版部 편, 現代朝鮮文學全集 ≪隨筆紀行集≫ 朝鮮日報社, 1938
   朴勝極, 隨想·紀行 ≪多餘集≫, 金星書院, 1938
   金東煥 편, 紀行 ≪半島山河≫-勝地 八景 史蹟 八景, 三千里社, 1941
   申瑩澈 편, ≪滿洲朝鮮文藝選≫, 新京 特別市, 朝鮮文藝社, 1941
   李泰俊, ≪無序錄≫, 博文書館, 1941
   朴鍾和, 隨筆 ≪靑苔集≫, 永昌書館, 1942
   金東錫 隨筆集, ≪海邊의 詩≫, 博文出版社, 1946
   金哲洙·金東錫·裵澔, 三人 隨筆集 ≪토끼와 時計와 回心曲≫, 서울출판사, 1946
   金晉燮, ≪人生禮讚≫, 東邦文化社, 1947
   李敭河, ≪李敭河 隨筆集≫, 乙酉文化社, 1947
   金起林 隨筆集, ≪바다와 肉體≫, 平凡社, 1948
   金瑢俊, ≪近園隨筆≫, 乙酉文化社, 1948
   金晉燮, ≪生活人의 哲學≫, 宣文社, 1949
   金素雲, ≪馬耳東風帖≫, 高麗書籍, 1952

 

   위의 여러 수필집 중 ‘조선일보사’가 출판한 ≪수필기행집≫을 제외한 13권의 수필집에 나타나는 특징 하나가 있다. 그것은 저자 혹은 편자 13인 가운데 수필이 전업인 문인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다. 하기야 그 시절 전업 문인은 온 나라를 다 뒤져봐야 한두 사람 정도였으니10) 본업은 불문에 붙이고 ‘수필’을 중심 장르로 문학 활동을 하는 문인은 겨우 세 사람 정도이다.
   한국 현대문학사상 최초의 본격 수필집 ≪다여집≫의 저자 박승극은 평론가이자 소설가이고, 김동환은 시인, 신영철은 수필집 ≪만주조선문예선≫을 편집하고 그 수필집에 수필 발표도 했지만, 재만조선인 창작집 ≪싹트는 대지≫를 편집했고, 조선인의 한이 서린 마도강11) 천지에 대동아공영과 오족협화를 소리 높여 외치는 ≪반도사화와 낙토만주≫를 평산영철平山瑩澈이란 이름으로 편집하면서 윤해영의 <낙토만주>, 그 민족배반의 시12)를 표지에 싣고, <재만조선인교육의 과거와 현재>라는 엄청 공들인 논문을 발표하던 편집인이자 논객이다. 이태준과 박종화는 소설가이고, 김동석은 경성제대에서 영문학을 대학원까지 공부한 평론가, 시인, 수필가이고, 김철수는 시인, 배호는 김동석이 간행하던 종합문예지 ≪상아탑≫을 통해 수필 발표를 많이 했지만 문인이라기보다 사회주의 이데올르그로서의 역할을 더 열심히13) 한 행동파 지식인이었다. 김기림은 주지하듯이 시인이고, 김용준은 화가다. 이렇게 되면 남는 사람은 김진섭, 이양하, 김소운뿐이다.
   필자 13인의 이런 성향은 신문학 이후 최대 호화 필진으로 묶인 수필앤솔로지 ≪서재여적≫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여기서도 수필은 여기라는 의미가 된다. 결국 이상의 논의는 1950년대까지 드러난 수필의 장르적 성격은 ‘수필은 여기의 문학이다.’로 정리된다.
   ≪서재여적≫의 문학사적 자리는 이 소결론과 바로 연결된다. 곧 ≪서재여적≫은 한국현대 수필문학사에서 수필이 여기의 문학이라는 사실을 확정시키는 자리에 있다. 이 점은 이 수필집에 작품을 쓴 수필가의 인적 사항 점검에서 드러났고, ≪서재여적≫ 필자의 이런 성분은 다름 아닌 전 시대 수필문학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사실임을 ≪다여집≫에서 ≪마이동풍첩≫까지, 단행본 수필집 13권의 저자 분석에서 확인되었다.

 


3. ≪서재여적≫ 수필의 형식-문예수필과 문예론수필의 양립


   ≪서재여적≫에는 17인의 필자가 쓴 작품 63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들은 그 형식이 크게 두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째는 문예수필miscellany 형식이고, 다른 하나는 문예론수필critical essay 형식이다. 나타난 실상은 다음과 같다.

 

   피천득의 작품은 <수필> 외 5편인데 모두 문예수필이다.
   박종화는 <사화단思花壇>외 4편인데 문예론수필이 한 편 더 많다.
   양주동은 <면학의 서>외 5편인데 1편이 문예수필이고 나머지는 모두 문예론수필이다.
   김성진의 작품은 <PEN>외 4편인데 그중 두 편이 문예수필이다.
   주요섭의 작품은 <미운 간호부> 외 5편, 그중 한 편이 문예론수필이다.
   유진오의 작품은 <역설> 외 4편인데 그중 한 편이 문예론수필이다.
   이병도의 작품은 <세계 해전사상에 빛나는 충무공> 외 5편인데 그 한편이 문예수필이고 나머지는 모두 문예론수필이다.
   이희승의 작품 <기지의 두 가지> <오 척 단구> <호변號辯>이 모두 문예수필이다.
   이양하는 <해방도덕> 외 3편의 수필을 발표하고 있는데 모두 문예론수필이다.
   손우성의 작품은 <투쟁의 어의> 외 3편인데 모두 문예론수필이다.
   조용만은 <교양과 고전> <조춘잡기> 두 편을 수록하고 있는데 문예수필과 문예론수필이 각각 한 편씩이다.
   이헌구는 <광명에의 용진> <우애> 두 편인데 문예수필과 문예론수필로 나누어져 있다.
   박종홍의 <길>은 장문의 문예론수필이다.
   이하윤의 <메모광> 외 4편의 수필이 모두 문예수필이다.
   오화섭의 <판권과 사과 궤짝>과 <권태>는 모두 문예수필이다.
   장익봉의 <Sisyphus>, 권명수의 <도보 15분>은 문예수필이고, <나의 길을 지키련다>는 문예론수필이다.

 

   위에 나타난 사실을 근거로 할 때 한국의 수필형식은 기본적으로 문예수필과 문예론수필 두 형식이 존재한다. 이런 현상은 이 수필집이 당대 최고의 인문학 교수를 필진으로 한 결과라는 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교수라는 형식적 권위로서가 아니라 문학연찬에 바친 한 결과로서의 수필의 개념, 한 문인의 자격으로 수필이란 장르에 대한 글쓰기의 결과로서 나타난 현상인 까닭이다.
   이런 사실은 1940년대 초·중반에 출판된 13권의 단행본 수필집에서 발견한 결과와 동일하다. 다시 말해서 ≪서재여적≫의 이런 사실은 한국수필문학에 나타나는 관습적 제도, 또는 전통의 한 발현이라 하겠다.
   이런 결과에 조선조의 ≪연행록≫ ≪열하일기≫, 개화기의 ≪서유견문≫ 등과 1920년대의 ≪심춘순례≫ ≪금강산유기≫, 일제강점기 말 ‘조선일보사’ 편 현대조선문학 ≪수필기행집≫과 김동환 편 기행 ≪반도산하-승지팔경 사적팔경≫, 곧 조선조의 그 기행문학의 형식을 잇는 기행수필집, 또 김소운의 ≪마이동풍첩≫으로 대표되는 서사수필을 더한다면 한국의 수필형식은 ‘문예수필’, ‘문예론수필’, ‘기행수필’, ‘서사수필’ 4형식이 된다.
   이것은 구체적 문학현상으로부터 귀납된 결론이라는 점에서 이의 제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4. ≪서재여적≫의 명문장과 그 너머의 또 다른 형식


   ≪서재여적≫의 속 표제에 ‘명문장가 17인’이라는 말은 한국수필문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또 하나의 답을 시사한다. 동양에는 옛날부터 명문장가란 말이 있었다.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도연명陶淵明, <적벽부赤壁賦>의 소동파蘇東坡가 그런 예일 터인데 이 명문장가란 지금의 문체이론으로 보면 명수필가에 해당될 것이다. 우리의 경우 <산정무한>의 정비석, <낙엽을 태우면서>의 이효석, 김기림의 수필 <길>이 시로 읽히는 그런 글쓰기가 명문장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수필=명문장’으로 보면 문예론수필의 개념은 없다. ≪서재여적≫의 경우 편집자는 수필의 개념을 하나로 보고, 17인의 명문장가 집필이라 내세우고 있지만 필자 개개인은 문예수필과 문예론수필을 함께 아우르고 있다. 특히 외국문학을 전공한 양주동(영문학), 손우성(불문학)의 글에 이런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두 사람의 문예론수필 중심의 수필은 ‘명문장=수필’로 보는 동양적 수필의 개념과는 무관하게 수필의 영역을 확장하면서 장르개념에 확실한 다른 원론을 제공한다. 결과적으로 피천득 식 수필의 개념이 수필의 한 하위 갈래, 즉 문예수필만 겨냥한 논조로 그것이 문제적 글임을 수필의 글쓰기 형식으로서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수필집이 강조하는 명문장의 문예수필은 피천득의 글로 대표된다. 피천득은 ≪서재여적≫에 <수필> <봄> <시골 한약국> <장수> <보스톤·심포니> <나의 사랑하는 생활> 6편을 발표하고 있는데 이런 작품은 하나같이 작가의 주변사가 피천득 특유의 표현을 통해 온아우미한 작품으로 형상화되고 있다.

 

   나는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한다. 웃는 아름다운 얼굴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수수한 얼굴이 웃는 것도 좋아한다. 서영이 어머니가 자기 아이를 바라보고 웃는 얼굴도 좋아한다. 나 아는 여인들이 인사 대신으로 웃는 웃음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를 가는 우리 딸 웃는 얼굴을 사랑한다.14)

 

   전부 단문이다. 마지막 한 문장은 빼고, 모든 문장의 주어와 서술어가 같다. 두세 문장으로 써도 문장이 길지 않을 텐데 이렇게 늘어놓고 있다. 글의 내용전달을 목적으로 한다면 비경제적이다. 그러나 피천득은 그런 것에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다. 미문에 대한 욕구 때문이다. 한 개인이 막연한 낙관론자이든 그 반대의 리얼리스트이든 그것은 자유에 속한다. 그러나 그가 문인일 경우 그의 세계관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좀 복잡해진다. 그 가운데 하나가 역사적 소명에 대한 인식이다. 그런데 피천득은 그런 문제에 대해선 오불관언吾不關焉이다. 비슷한 시기 ‘교수’ 조지훈이 수필집 ≪지조론≫에서 <선비의 직언> <의기론>을 통해서 사회와 정치에 보이는 관심에 비하면 교수 피천득은 너무나 다르다. 피천득은 작은 것들의 세계에 탐닉하면서15) 한생애가 전쟁으로 독재로 혁명으로 소용돌이 칠 때도 ‘좋아한다. 사랑한다.’며 ‘교수 선비’로 미문의 글을 쓰며 살았다. 풍파 없는 자기 주변만 돌아보며 자성적 삶을 영위했기에 현실인식이 소박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글의 소재와 사유도 복잡하지 않을 것이기에 단문으로 담아내도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또 현실과 거리를 둔 생활이었기에 그 반응은 비판보다 순응의 문예수필로 나타났을 것이다.
   피천득의 수필이 이렇게 소박 단아하다면, 양주동의 수필은 수사가 현란하고, 다양한 사고를 대위법으로 표현한다. 수필 <면학의 서> 한 대문을 보자.

 

   혹은 정평 있는 고전을 읽으라, 혹은 가장 새로운 세대를 호흡한 신서를 읽으라, 각인은 각양의 견해와 각자의 권설이 있다. 전자는 가로되 ‘溫故而知新’, 후자는 말한다. ‘생동하는 세대를 호흡하라.’ 그러나 아무래도 일변도는 할 수 없는 일이요,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지식인으로서 동서의 대표적인 고전은 필경 섭렵하여야 할 터이요, 문화인으로서 초현대적인 교양에 이보라도 낙후될 수는 없다. …(중략)…
   다독이냐 정독이냐가 또한 물음의 대상이 된다. ‘男兒須讀五車書’는 전자의 주장이나 ‘博而不精’이 그 통폐요, ‘眼光이 紙背를 徹함’이 후자의 지론이로되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함’이 또한 그 약점이다. 아무튼 독서의 목적이 ‘모래를 헤쳐 金을 나타냄’에 있다면 필경 多와 精을 겸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것 역시 평범하나마 博而精 三字를 표어로 삼아야 하겠다.16)


   소재가 신변잡기가 아니다. 문장이 복문, 중문으로 얽혀 있다. 폭이 다른 관점과 깊이가 다른 사유가 서로 교차하고, 전달할 내용 또한 과거와 현대가 맞선 까닭이다. 공부가 남다른 한학지식을 끌어와 다독과 정독을 병행하는 것이 좋다는 자신의 관점을 입체적으로 설득한다. 대구형식으로 글의 흐름을 관리하기에 평범한 문제지만 그 긴장감이 가독성을 자극한다. 엎고 뒤치는 패댄틱pedantic한 글 솜씨가 과연 명문장이라 이를 만하다. 논쟁적 성격을 지닌 소논문, 곧 문예론수필의 전범이라 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겠다.
   피천득의 글과 양주동의 글은 소재 자체부터 다르다.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면학의 서>처럼 현학적으로 쓰는 것은 어렵고 글감과 어울리지도 않을 것이지만 <면학의 서>를 부드러운 문예수필로 쓰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필자의 의도는 애초부터 다르고, 두 사람의 전공이 영문학이란 공통점이 있지만 학문의 성향 또한 다르기에 앞의 글은 문예수필로 뒤의 것은 문예론수필이 되었다.
   이렇게 ≪서재여적≫이 그렇게 내세운 ‘명문장가’는 피천득의 문예수필과 양주동의 문예론수필로 그 표제에 값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서재여적≫의 수필은 문예수필보다 문예론수필이 더 많다. 흥미 있게도 이 수필집에는 ‘길’이 테마가 된 작품이 셋 있는데 모두 문예론수필이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인용한 바 있는 피천득의 <수필>에 나오는 길은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 가로수 늘어진 페부멘트,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의 길’이다. ‘길’이란 대상을 수필과 비유한 피천득 특유의 감성적 사유로 명문의 문예수필이 되었고, 그 결과 이 글 한 편이 한국현대수필문학에 끼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다. 그런데 피천득에게는 이렇게 아름답기만 한 길이 이양하의 길, 박종홍의 길, 권병수의 길은, ‘도道로, 아포리아Aporia로, 온갖 세상사가 벌어지는 장소’로 굴절된다. 우선 한 대문씩 읽어보자.

 

   1). 길은 모든 경우에 있어 우리를 안전하게 우리가 가야 하고 가고자 하는 곳에 이끌어 주는 것이었고 또 거기서 길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안도감 내지 환희를 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 놓인 고개길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실은 이 원시적 안도감 내지 환희에 연유하는 것이라 하여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길은 ‘길이 아니거든 가지 말라’는 말에 있어 보는 바와 같이 곧 우리 윤리세계로 통한다. 우리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바 아버지로서 할 바 아들로서 할 바 형제로서 할 바 친구로서 할 바 부부로서 할 바 한 시민 국민으로서 할 바를 바로 길 또는 도리라 한다. 길은 여기에 있어서는 수사학상의 이르는바 은유다.17)

 

   2). 나는 맨 처음에 길을 밖으로 통하는 육로 수로 항공로에서 보았고 다음에는 의사를 소통하며 또 생각하는 말이라는 길, 방법이라는 길에 언급하였다. 그리고 동양의 참(誠)이라는 길이 있음을 생각하였다. 밖으로부터 속으로 길의 뜻이 깊어진 것이라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사람의 살 길을 주로 밖으로 향하는 힘에서 찾으려는 것이 서양의 과학적인 사상이요, 자기 마음속으로 깊어지는 데서 찾으려는 것이 우리 도양의 전통적인 사상인 줄 안다.18)

 

   3). 어느 널찍하고 쓸쓸한 길을 내가 걷고 있을 때의 일이다. 나는 내 몸차림에 무슨 허름한 곳이 있어서 남에게 험악한 인상을 준다든가 하는 곳도 없었고 또 내가 무슨 얄궂은 몸짓을 하거나 해서 행인에게 위험성을 느끼게 할 만한 일도 없었던 것은 지금까지도 보증해서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그때에 느린 걸음으로 점잖이 땅을 내려다보면서 무엇엔가 생각에 잠겨가지고 길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허다가 나의 시선은 갑자기 길을 가로질르면서 내 앞을 막고 나오는 6, 7세쯤 되어보이는 남자애의 시선과 마주쳤던 것이다. 애는 당돌하게도 기다란 작대기를 높이 들고 무슨 짐승이나 모는 것처럼 입가에 경멸하는 미소까지 띠우면서 내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의외의 적에게 될 수 있는 데까지 험상궂은 빛을 두 눈에 띠우고 걸음걸이를 늦추면서 본능적으로 방어태세를 취해가지고 작대기의 피해를 모면했으나 그러한 철모르는 어린애에게까지 나의 위엄이 짓밟혀져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고 생각해 볼 때 은근히 나는 화가 치밀었다.19)

 

   글 1)의 서두는 부산 피난시절 필자가 걷던 먼지 많고, 돌 많고, 하수구 냄새가 지독한데 거기다가 점포가 줄을 잇고, 오물투성이에 늘 싸움판이 벌어지던 길에 대한 회상이다. 그런데 글이 전개되면서 그 길은 아름다운 고개 길로, 그 길은 다시 우리의 윤리적 도덕관, 즉 사람의 도리로 메타퍼라이즈 된다. 길을 현상적인 것이 아닌 인간의 도리로 비유하면서 그 테마를 이성적 논리로 사유함으로써 문예론수필이 되었다.
   글 2)는 길을 처음에는 육로로, 다음에는 말, 곧 로고스logos로, 그리고 길을 동양의 ‘참’, 성실誠實의 의미로 전이시키면서 사유를 확장해 나가 마침내 그것을 인간이 어떤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지켜야 할 도리로 결론을 맺는다. 글 1)처럼 길을 인간의 도리로 비유하고 그것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글 3)은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자리를 침범당하지 않겠다는 자존의 논리다. 이 필자는 어린 아들로부터, 또 인용된 부분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어린이의 당돌한 행동, 그리고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깨(깡패)’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자존심이 많이 상한다. 그러니까 길을 가다가 자존을 무시하는 이런 저런 세상사를 경험한 후 그에 대한 반성을 하면서 자기가 지녀야 할 인간으로서의 자리를 지키겠다는 깨달음이다.
   이상 세 수필의 길은 그 표상이 피천득의 그것과 아주 다르다. 길을 인간의 도리로 보는 점은 셋이 서로 닮았다. 다만 소재를 전개하는 방법이 다르다. 길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는 점은 예술적 발상(문예수필)이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따지면서 주장을 펼치는 것은 과학적 발상(문예론수필)이다.
   우리는 여기서 마침내 이 수필집이 ‘대학교수 명문장가 17인 집필’이란 서두의 문제를 다시 염두에 두고 결론을 내려야 할 때가 되었다.
   ‘대학교수 명문장가 17인 집필’은 미문체 지향의 문예수필만 지칭하고, 그것과 양립하는 문예론수필, 즉 테마를 논쟁적으로 전개하며 그것을 심화하는 소논문 형식의 글쓰기는 수필의 개념으로 묶지 못했다. 그 결과 피천득의 <수필>로 대표되는 자성적 미문체 문예수필이 ‘수필’이라는 개념으로 굳어지게 만드는 한 원인이 되었다. 특히 피천득의 <수필>이 호화판 수필 앤솔로지 ≪서재여적≫의 첫 작품이 됨으로써 대학교수 명문장가란 화려한 호칭이 결과적으로 피천득 한 사람을 겨냥한 것처럼 되었다. 문예수필의 성격과 창작기법인 <수필>이 그렇게 유명하게 된 원인이 이런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5. 마무리


   지금까지 논의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수필집 ≪서재여적≫의 ‘여적餘滴’이란 ‘여기餘技’란 말이다. 이 수필집에 이렇게 표상된 ‘수필’의 성격과 같이 1950년대 말까지 한국수필문학은 그 작가가 고유한 장르적 성격을 전문적으로 아우르는 글쓰기가 아닌 취미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주장은 1938년 ≪다여집≫에서부터 1952년 ≪마이동풍첩≫까지13개 단행본 수필집의 저자 점검에서 수필가는 거의 없고, 다른 장르가 중심이면서 수필집을 간행한 사람이 절대 다수란 결과와 신문학 이후 최대 호화 필진으로 묶인 수필 앤솔로지 ≪서재여적≫의 필자 성격에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서재여적≫의 문학사적 자리는 한국현대 수필문학사에서 수필이 여기의 문학이라는 사실과 또 한국의 수필형식은 문예수필과 문예론수필 두 형식이 기본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자리에 있다. 이런 결론은 ≪서재여적≫의 수필이 당대 최고의 인문학 교수를 필진으로 한 사실, 그리고 형식적 권위로서의 교수가 아닌 문학과 문학연찬에 바친 한 문학 연구자로서의 수필의 개념, 한 문인으로서 수필이란 장르에 대한 글쓰기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여기에 조선조의 ≪연행록≫ ≪열하일기≫ 등, 개화기의 ≪서유견문≫, 1920년대의 ≪심춘순례≫ ≪금강산유기≫ 등, 일제강점기 말 ‘조선일보사’ 편 현대조선문학 ≪수필기행집≫과 김동환 편 기행 ≪반도산하-勝地八景 史蹟八景≫, 곧 조선조의 그 기행문학의 형식을 잇는 기행수필과 김소운의 ≪마이동풍첩≫으로 대표되는 서사수필을 더한다면 한국의 수필형식은 ‘문예수필’, ‘문예론수필’, ‘기행수필’, ‘서사수필’ 네 형식이 된다. 이것은 구체적 문학현상으로부터 귀납된 결론이라는 점에서 이의 제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서재여적≫이 내세운 ‘명문장가’ 문제는 피천득의 문예수필과 양주동의 문예론수필로 그 이름에 값하고 있다. 그러나 ≪서재여적≫의 수필은 글의 테마를 논리적으로 따져 논쟁적 성격으로 심화 확대시키는 문예론수필이 더 많다. 그러나 한국의 당대수필은 이런 관습이 거의 단절된 상태에 와 있으니 앞으로는 한국 수필장르 본래의 이런 특성을 살리는 창작행위로 진로를 수정함이 마땅하다. 한국현대수필이 지금까지 이런 전통을 형성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대학교수 명문장가 17인 집필’이란 속 표제는 미문체 지향의 문예수필만 지칭하고, 테마를 논쟁적으로 전개하는 소논문 형식의 글쓰기, 문예론 수필의 개념은 함께 묶지 못했다. 그 결과 피천득의 <수필>로 대표되는 자성적 미문체 문예수필이 ‘수필’이라는 개념으로 굳어지게 만드는 큰 원인이 되었다. 특히 피천득의 <수필>이 호화판 수필 앤솔로지 ≪서재여적≫의 첫 작품으로 편집됨으로써 대학교수 명문장가란 화려한 호칭이 결과적으로 피천득 한 사람을 겨냥한 것처럼 되었다. ‘문예수필의 성격과 창작기법의 성격을 지닌 <수필>’이 범 수필문학, 곧 위에서 말한 4종류의 수필문학을 다 포괄하는 개념처럼 독해되어 그 영향이 지금까지 확산되어 있는 이유가 이런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 ≪평화신문≫, 1951년 5월, 영역 <KOREA> 제2호.

2) <수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 합동수필집이 처음이다.

3) 大學敎授 名文章家 十七人 執筆; ≪書齋餘滴-大學敎授 隨筆集≫(耕文社, 1958년). 1쪽.

4)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리는 행위. 당시 상이군인들은 불구가 된 몸이라 일자리도 없고, 돈도 없어 물품을 강매하다시피 하였고, 무전취식을 한 후 돈이 없다며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일이 많았다. 살아갈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5) 피천득, <봄> 첫 문장, 앞 수필집, 3쪽.

6) 목차에 나오는 이름은 원고 도착순이다.

7) 피천득의 <수필>의 한 대문.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溫雅優美하다…….’

8) 피천득의 대표작품인 <수필>이 처음 실린 수필집이 ≪서재여적≫이다. 그것도 이 수필집의 첫 작품이다. ≪금아시문선≫에도 이 수필이 수록되어 있으나 이 시 문선은 ≪서재여적≫ 이듬해에 같은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9) 이 자료는 필자가 5년간 발품을 팔아 수집한 결과다. 이 기간에 출판된 단행본 수필집이 위의 자료 외에 있다는 말은 내가 과문한 탓인지 아직 들은 바 없다. 강호제현의 지도를 바란다.

10) 아마 수필집 ≪산정무한≫ 문제소설 ≪자유부인≫의 저자 정비석, ≪순예보≫ ≪진리의밤≫의 대중소설가 박계주 정도였을 것이다. 정비석은 어느 신문에서 자기 직업을 말하면서 자기가 ‘이 길로 들어선 게 처음부터 잘못되었으며 지금이라도 수입이 괜찮은 직업이 있으면 글쟁이 직업을 당장 때려치우겠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서정주, 김동리, 박종화와 같은 대가도 전업작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대학교수란 본업이 있었다.

11) 만주와 간도를 가리키는 순수 한국어. 오양호, ≪만주시인집 연구≫(도서출판 역락, 2013) 참조.

12) 오양호, 앞의 책, 참조.

13) 1945년 12월 16일 조선문학가 동맹 간부명단에 의하면 배호는 조직부장이다. 그 다음 서열로 현덕이 출판부장, 그 밖의 장르별 위원장으로 시부 위원장에 김기림, 소설부 위원장에 안회남이다. 이렇게 배호는 남로당 하부 조직이던 문맹 최후의 사령탑이었다. 정영진, ≪문학사의 길 찾기≫(국학자료원, 1993). 124~141 쪽 참조.

14) 피천득, <나의 사랑하는 생활> ≪서재여적≫, 9쪽.

15) 김우창, <작은 것들의 세계>, ≪궁핍한 시대의 시인≫(민음사. 1977), 252쪽.

16) 양주동, <면학의 서> ≪서재여적≫, 23~24쪽.

17) 이양하, <길에 관하여>, 앞의 책, 159쪽.

18) 박종홍, <길>, 앞의 책, 216~217쪽.

19) 권명수, <나의 길을 지키련다>, 앞의 책, 247~248쪽.

 

 

오양호  -----------------------------------------
   경북 칠곡 출생. ≪현대문학≫으로 평론등단.≪시문학≫을 통한 시 창작, 수필집 ≪백일홍≫ 평론집 ≪낭만적 영혼의 귀환≫ 외. 저서 ≪그들의 문학과 생애, 白石≫(한길사). ≪만주시인집 연구≫(역락)등. 역서 ≪鄭芝溶詩選≫(花神社.東京. 대산문화재단지원). 교토대 객원교수(日·韓교류기금지원). 중앙민족대, 길림대 객좌교수 역임. 심연수문학상, 신곡문학대상 수상. 현 인천대 명예교수.

출처 : 신아출판사
글쓴이 : Shina wow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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