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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수필과비평 2013년 3월호, 수필가가 감동한 명수필] 가장 오래 남는 향기 : 박규환의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 - 최원현

늘샘 2016. 5. 9. 10:06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쩌면 나도 내 삶의 마지막 봄을 지금 맞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아무리 봄이 희망이고 생명이라도 그 봄을 마지막으로 맞는다면 그게 어찌 희망이고 생명이랴. 그래서 선생의 수필 <아직도 봄을 기다리며>를 생각하면서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읽다보면 안타까움 가득 선생의 심정이 더욱 잘 이해가 된다."

 

 

 

 

 

  가장 오래 남는 향기 최 원 현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  -  박규환


   여러 해 전에 나는 <아직도 봄을 기다리며>라는 어설픈 글을 썼던 기억이 있다.
   그때라고 내가 무슨 봄을 기다려 애탈 만큼 염치 있는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다. 그때도 이미 칠순을 넘긴 노인이었으니 요즘 자주 쓰이는 말을 빌자면 “종량제 쓰레기 봉지에 담긴 채 대문 앞에서 쓰레기차가 오거나 기다릴 푼수였고 따라서 봄이 온대서 내 젊음이 되살아난다거나 일찍이 품어본 적이라곤 한 번도 없었던, 젊은이라면 으레 가져야 된다고 할 말에 궁한 훈장이 자주 차용借用하는 그 ‘야망’의 새싹이 뒤늦게 눈틀 기적을 기다려서도 아니었다.
   늙었으므로 봄이 오면 그냥 날씨가 따뜻해서 좋고 요란搖亂한 백화百花가 싫을 리 없으며 산들거리는 봄바람에 실눈을 감으면 멀리 잊혀진 젊은 날의 추억이 졸음이 오듯 다녀가기도 하는 그런 봄을 난들 싫어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간절한 기다림의 대상이기도 했을 것이다.
실은 내가 오랜 세월 봄을 기다리며 살아 온 이유의 대부분이 오랜 병석에 누웠을 때 누군가의 봄이 오면 차차 나을 것이란 예언 비슷한 말이 내 병약한 심신에 위안과 기대를 주었고 또 지금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버린 아내가 희망도 없는 병석에 누워 있을 때 나 스스로도 믿지 않는 같은 말을 신비로운 봄의 힘에 우의寓意를 담아 열심히 타이르던 그 말이 바로 <아직도 봄을 기다리며>라는 조잡한 내용의 글이었다.
   봄은 원래 찬란한 희망의 계절이라 가을을 위해 씨를 뿌리는 계절이요 햇볕 다사로와 새싹 돋아나고 검은 대지의 조화造化가 빚어내는 색채 다양한 꽃들의 경염競艶, 검은 어미의 자식인데 검은 꽃이 없음은 날로 세상에 피어나는 악惡의 검은 꽃만으론 안 된다고 설교함일까!
   어찌 됐건 그땐 여러 가지 뜻에서 봄이 오기를 기다렸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목숨을 끌어안고 봄이 오기를 기다리던 아내를 생각할 때 지금도 엷은 눈물이 안구眼球를 덮는다.
   내가 병석에 눕기 전 한때 꽃 가꾸는 취미를 가진 적이 있었다. 2백 개 3백 개의 화분을 매만지면서 지나다보면 어느새 봄은 신록으로 변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상춘賞春이라는 말을 잊은 채 한 계절의 세월을 허송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게 바로 상춘이지 봄맞이의 기쁨이 따로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때는 봄을 기다려야 할 만치 내게도 희망이라느니 기대라느니 그런 것도 있었고 죽음이란 말은 아직 배우지 못한 채 젊음을 보냈고 내가 칠순을 넘기고 나서도 자유롭지 못한 보행에다 앓고 눕는 것이 나의 본업쯤일 때도 죽음 같은 건 별로 생각지도 않았었다.
   젊었을 때 몇 번이나 죽음 직전까지 다녀왔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대담해졌는지 모를 일이다. 거기다 항시 건강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 온 탓으로 사람 사는 것이란 모두 이런 것쯤으로 알았던 착각이 죽음은 아직도 내게서 멀다는 또 다른 착각을 불렀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던 나인데 아내가 죽고 나서 갑자기 늙어짐을 몸과 마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남녀유별의 옛날 부부란 게 다정했으면 얼마나 다정했으랴만 그중에도 나는 언제나 아내에 대해선 허장성세虛張聲勢가 장부된 체면이나 권위인 걸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옛 어른들이 그랬듯이…….) 이제 생각하면 그건 나의 애정의 또 다른 표현이었을 뿐임을 깨달은 지금은 내가 사는 동안에 회한이 있다면, 혹은 죽은 뒤에라도 내게 뉘우침이 있을 양이면 별것도 아닌 권위의식에 우쭐댔던 나의 협량狹量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권위를 뽐낼 대상이 없어졌으니 이제 나는 봄 같은 건 기다릴 필요가 없어진 것 같은 엉뚱한 핑계를 대곤 한다.
뽐내는 것과 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련만 그게 어느 편에서 생각하면 일종의 추모일 수도 있고 이제 참으로 얼마 남지 않은 세월인데도 이다지 길게 느껴지는 모순은 나의 하찮은 권위를 달래줄 상대가 없어진 고독의 탓으로 돌릴밖에 도리가 없을 것 같다.
   어찌 됐건 나는 이제 봄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을 잃어가고 있다.
   봄이 오면 햇볕 다사롭고 꽃 피고 새 우는 자연의 반복을 80년 가까이 경험했으니 되풀이 두세 번도 싫증날 일이 적잖은데 그래도 모자랄 것이 무엇이며 언제나 그게 그것 아니던가! 이런 생각이 바로 내게서 봄 기다림을 앗아간 이유인 듯싶다. 무슨 희망이 있고 기대가 있다거나 하다못해 다정한 사람 만나 이야기 나눌 기회가 없기는 겨울이나 다를 게 없는데 이제 봄을 기다릴 흥미가 있을 턱이 없다. 젊기라도 해서 봄이 오면 특별히 해야 될 일이 있다거나 약속된 기쁨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봄이 어느새 여름으로 바뀌고 나면 나의 남은 세월에서 한 해 4분의 1을 앗아간 꼴이고 보니 봄이 영광일 때는 이미 지난 지 오래다.
   거기다 나의 주변에 봄이 와 주기를 바라는 요건이 모두 없어지면서 봄 기다리는 마음에 이변이 왔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의 앞날이 머지않아 이렇게나마 살아갈 날이 몇 날이 될지 몇 달이 될지 모르는데다 날로 달라져 가는 육체적 정신적 시들어가는 변화에 부딪치면서 봄 기다리는 화사한 꿈을 어떻게 제대로 간직할 수 있겠는가!
   돌이켜보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마을에 정착한 지 10년이 넘는다. 그땐 서울이란 곳이 우리나라 수도란 것밖에 모르는 나로선 관청에 잡아다 놓은 촌닭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는 아는 사람 하나 없고 갈 곳도 없었으며 설혹 갈 곳이 있었대야 이 현란한 서울의 거리에 나는 한 마리 길 잃어 허둥대는 개미에 불과했다.
   이럭저럭 지나는 동안 우리 마을이 불광천변임을 알게 되고 이 불광천 냇물이 우리 마을과 건너편 마을을 갈라놓고 있는데 곳곳에 다리가 놓여 있어서 사람이나 차량의 교통에 지장을 주는 일은 별로 없었다.
   내가 서울에 온 게 늦가을이었으므로 죽은 듯이 한겨울을 지나고 봄이 오자 남들처럼 이른 새벽에 산책을 나다니기도 하고 차차 통이 커져서 다리 건너 마을 앞 8차선 도로의 인도人道를 따라 이 애잔한 건강을 위한답시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만보蔓步 걷기를 시도하곤 했었다. 거기서 나와 같은 목적을 가진 노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고 며칠이고 눈에 띄지 않으면 기다려지기도 하는 친구가 생기기도 했다.
   매일 새벽 불광천 언덕을 걸으면서도 그 기나긴 언덕을 뒤덮은 얽히고설킨 가시덤불 같은 게 무슨 나무인가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3월이 다해갈 무렵 잎새도 싹트기 전에 노란 꽃망울들이 터지더니 마침내는 끝없는 냇물의 양편 언덕이 노란빛 천막을 덮어씌운 듯, 푹신한 노란 이불을 깔아 놓은 듯 온통 꽃으로 덮여 있는데 그 꽃이란 것의 하나하나는 호롱불보다도 클 것 없는 작은 꽃잎의 모듬이었다. 이른바 그게 남 먼저 초봄을 알리고 이내 저버리는 개나리 꽃숲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열 번의 봄을 이 개나리의 꽃숲을 헤맨 셈인데 잠깐 피었다 이내 저버리는 이 단명短命한 꽃은 화무십일홍인데 겨울을 빼곤 끊임없이 피어 궁할 줄 모르는 무궁화를 국화國花로 정한 조상의 뜻을 짐작할 수 있으나 화들짝 피었다 사라지는 개나리도 어차피 순간의 영화를 즐기고 끝날 세상의 상징으론 밉지 않다. 그러나 이 꽃이 나를 열 번 즐겁게 한 것 이상으로 나를 아쉽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10년 동안의 3분의 1은 혈압으로 쓰러졌던 아내와 동반이었다. 죽음이 멀지 않은 자의 눈에도 꽃은 기쁨이었던 듯 아내는 꽃잎을 만지느라 자주 불편한 다리를 멈추곤 했다. 그 뒤 얼마지 않아 아내는 다음해 개나리꽃을 다시 보지 못한 채 결국은 갈 곳으로 가버리고 그 뒤론 처음 내가 발견했던 그 개나리 언덕을 또다시 나 혼자 걷기를 4년째가 넘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내가 가버린 뒤의 개나리 언덕은 내겐 기쁨보다는 슬픔이 더했고 언덕에 개나리가 필 무렵이면 아예 그곳에 나타나지 않고 아침 산책의 코스를 바꾼 게 두 해나 된다. 꽃이 다 진 뒤에 다시 그곳에 나타나면 꽃도 없고 사람도 없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그러던 지난해 가을 노인에게 자주 있을 수 있는 낙상落傷을 입어 겨울 내내 산책은 그만두고 외출마저 하지 못하다가 요즘 부드러워진 바람에 이끌려 얼마 전에 냇가에 나가보았더니 내가 겪은 10년의 강산이 변하고 있었다. 지하철이 이 천변을 통과하게 된다는 듯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는 물론 언덕을 온통 뒤덮었던 개나리숲은 땅을 파고 고르는 기계에 의해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고 쇠기둥 같은 철재鐵材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더러는 쇠기둥을 세우고 철판鐵板을 깔아 이 불광천변의 일부가 복개覆蓋되고 있었다. 이건 개나리 따위가 피고 지는 것이 아닌 천지개벽이었다. 나는 사라져버린 개나리숲에 대한 회고懷古의 아픔과 함께 실오리보다도 연약한 심술궂은 안도安堵가 싹트는 뜻을 모르지 않는다(개나리가 눈에 띄지 않으면 꽃잎을 만지는 아내의 추억에서 해방될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해서 개나리꽃 언덕에 개나리가 종적을 감추고 이 길이 연명延命의 행로行路란 신념으로 눈비 가리지 않던 첫새벽의 소요객들이 지금은 모두 어느 곳으로 산책길을 바꾸었는지 내가 나가지 못하고 그들이 나오지 않으니 이젠 만날 길이 없다. 이대로 다시 산책길이 뚫려서 옛날 모습으로 환원한다 치더라도 늙고 병든 이의 희망과 기대의 그 길에서 옛날의 그 얼굴을 몇 사람이나 찾아볼 수 있을지 아마 그들과의 재회는 이걸로 끝나기 쉬울 것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여기 개나리꽃처럼 이미 사라졌기 쉽고 아니면 내가 그들보다 먼저 지는 개나리일지도 모르니 그들과 나와의 관계는 잠시 옷깃 스쳐가는 인연이었을 뿐으로 가슴 어딘가에 아픔만이 남는다.
   지루한 탈선으로 처음 의도했던 생각들을 정리하지 못한 채 속된 수필관의 일례一例가 되고 말았다.
   80회의 봄을 맞이한다는 일은 참으로 엄청난 일이다. 그건 이 어려운 세상을 약삭빠르게 살아왔다는 증좌이긴 하니 그중 어느 한 봄도 이렇단 기억을 찾아낼 수 없으니 참으로 하잘 것 없는 생애였음이 자명하다. 봄이 어디 오늘 왔다가 다음날 가버리는 단명한 계절인가! 달수로는 적어도 석 달을 끈다. 그러니 240달의 봄을 맞고 보낸 셈인데 그 많은 봄들의 어느 한 봄의 기억의 편린이나마 더듬을 수 없으니 이제 내겐 아무 쓸모도 없는 봄을 더 기다리기가 부끄러울 노릇이다.
   불광천변의 개나리꽃도 꽃상여처럼 다시는 되돌아볼 수 없이 되고 내가 생애를 두고 매만져 왔던 화분들은 이젠 내 힘으로 감당할 능력이 없으니 깨지고 빈 화분만 담장 아래 무더기로 쌓이고 있다. 아니 올 사람을 기다림도 이젠 헛되고 이용가치가 없어진 나를 찾는 사람도 이젠 드물며 나와 비슷한 처지의 노인에게서 잠시 외로움을 달래고자 걸려오는 전화를 더러 받는 게 전부다.
   이런 부류의 사람에게도 봄은 기다릴 가치가 있는 것일까.
   거기다 들려오는 문 밖 소식은 어떤가?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요, 따라서 한 핏줄이요, 동포요, 언어가 같고 얼굴 생김이 같으며 온후하고 평화를 사랑하며 천성이 개결介潔한 백의白衣의 순결은 통일에만 적용되지 않는 자랑인가!
   통일의 희망이 믿어지지 않는 나라에 꽃피는 봄이 얼마나 영광된 일일 것이며 만나야 될 사람을 끝내 만나지 못하는 봄도 마찬가지다. 늙은 사람에게 기다릴 시간은 이젠 없다.
   돈이면 그만이니 그걸 위해서라면 따로 생각하고 망설일 이유란 없겠으니 해서 부끄러운 일이 하나도 없는 세상, 나중엔 아비의 목에 칼을 꽂는 봄이고 보면 햇볕 다사롭고 꽃망울이 이쁘고 향기에 취하고 싶어 봄을 기다릴 유유한한悠悠閑閑이 이제 다 살아버린 늙은 나에게도 있다면 그건 기적일 뿐일 게다.
   내가 앓았을 때 봄이 오면 나을 것이라던 예언 같은 위로를 믿고 기다렸던 봄이나 아내의 숙환宿患의 치유를 위해 애달프게 기다리던 봄은 이젠 내겐 없다.
   내가 만일 봄을 기다린다면 이젠 내 마지막을 기다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겠으니 봄도, 믿기 어려운 통일도 그 밖에 일체의 기다림에서의 해탈이 나의 기원일 뿐이다.
   봄 그 자체만은 영원히 찬란한 계절일 테지만 거기 희망을 건다거나 기다린다거나 한다는 것은 지구에 기생하는 각자의 조건에 따르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1995년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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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란 자연 질서 가운데 가장 반갑고 신비한 것이 아닐까 싶다. 죽은 듯 까맣게 변해버렸던 땅이며 나무가 어떻게 봄이 된 것을 알고 싹을 틔워 올릴 생각을 하고 언 땅을 녹여서 생명들을 불러내는지 신기하고 가상하다.
   꽤 오래전 시골에 과일나무 몇 그루를 심었었는데 다음해 봄 장모님께서 상기된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 과일나무에 꽃이 피었다는 것이다. 과일나무에 꽃이 핀 것이 무슨 큰일이라고 저러시나 생각하고 있는데 장모님은 그냥 꽃이 핀 것이 아니라 제가 어찌 사과나무이고 복숭아나무인지를 알고 사과꽃, 복숭아꽃을 피웠느냐는 것이었다. 그냥 아무렇게나 피는 것이 아니라 제가 피워야 할 꽃이 무언지를 분명히 알고 확실하게 그 꽃을 피워낸 나무가 기특하고 사랑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우린 일상에서 주어지고 되어지는 일들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하기에 고맙다거나 신기해하지도 않는다. 귀하다거나 감사히 생각도 않으며 그래서 늘 하찮게 여긴다. 그렇게 어제 한 약속까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는 인간들이니 저 하찮아 보이는 나무가 그것도 길고 긴 겨울 동안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게 까맣게 변해있던 것이 어떻게 이맘쯤이라 하며 후닥닥 싹을 틔워내고 꽃을 피워내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봄 자체가 기적이다. 봄이라 입 속으로 되뇌기만 해도 풀 향기 꽃향기가 입 안 가득 고이고 어디선가 벌 나비가 날아드는 환상에 젖을 만큼 봄은 신비롭고 놀랍다.
   그런데 박규환 선생의 봄은 안 그랬다.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쩌면 나도 내 삶의 마지막 봄을 지금 맞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아무리 봄이 희망이고 생명이라도 그 봄을 마지막으로 맞는다면 그게 어찌 희망이고 생명이랴. 그래서 선생의 수필 <아직도 봄을 기다리며>를 생각하면서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읽다보면 안타까움 가득 선생의 심정이 더욱 잘 이해가 된다.
   박규환 선생은 이 시대가 낳은 참 수필가다. 이만한 공감과 감동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수필을 쓰는 작가가 얼마나 있는가.
   선생의 호는 모헌慕軒이다. 1916년 전라남도 구례에서 태어나 일본 중앙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해방 후 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조선대학교와 전남대학교에서 영문학 교수로 후학을 길러내다가 1982년 전남대학교에서 정년을 맞은 영문학자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경제학을 전공했던 선생이 왜 영문학자로 변신했을까.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선생의 수필 작품들을 보면서 문학지향적 취향과 기질이 경제학자보단 영문학자 쪽이 더 맞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매원 박연구 선생이 어느 날 박규환 선생의 수필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으셨다. 책을 보내주셔서 읽었다고 했더니 아주 반가워하시며 “수필 좋지?” 하셨다. 웬만해선 좋다고 안 하시는 매원 선생인데 모헌 선생의 수필엔 ‘좋다.’를 연발하셨다.
   모헌 선생은 평생 병치레를 하셔서인지 겸손이 몸에 배어 있었다. 매원 선생이 좋다 좋다 하는 그런 수필을 쓰면서도 모헌 선생은 늘 ‘어쩌다 쓴 글장난’이라며 자신이 수필을 희필戱筆로 여겼다. 글을 하찮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겸손하셨다. 그런 그분에게 1993년 제6회 현대수필문학상 대상이 주어졌다. 웬만한 수필가들도 박규환이란 수필가를 아는 이가 드물 때였다. 그런데 그냥 수필문학상도 아닌 대상이었다. 이 대상은 1977년 제1회 금아 피천득 선생이 받으신 것을 시작으로 16년이 되는 그때까지 단 5명(피천득, 이희승, 김소운, 김태길, 차주환) 밖에 수상하지 못한 권위 있는 상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을 박규환 선생이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몇 편만 읽고 나면 금방 당연히 받을 만한 분이었음을 이해할 것이다.
   1990년 선생은 아내와 사별을 한다. 서울 불광천변의 10년 중 3년을 아내와 함께한 상태였다. 그런데 선생의 수필은 그 후 더 중후해진다. 노인, 고독, 삶, 죽음 등 빤한 내용들이 작품의 주제가 되는데도 전혀 가볍거나 식상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격이 있는 수필로 펼쳐진다. 그중에서도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자연의 질서와 삶의 질서를 하나로 보며 세상의 질서도 거기에 합류하길 바라는 선생의 철학과 인생관이 담긴 내용이다. 피고 지는 꽃들의 섭리, 오고 가는 생명의 질서, 태어나고 죽는 삶의 철학이 담담하면서도 절절하게 그려진다. 지난한 삶을 살아온 자만의 달관한 느낌이며 아쉬움이며 반성이다. 그러면서도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까 하는 방향을 제시해 준다. 자포자기가 아니라 순명이다. 아름다운 받아들임과 때를 앎이다. 내가 아는 때, 너희도 알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도 그런 선생의 수필을 읽는 마음에 안타까움이 가득찼다. 난 편지를 드렸다. <아직도 봄을 기다리며>에서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로 끝나버리지 않도록 <다시 봄을 기다리며>를 쓰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선생은 당신에게 몇 번의 봄이 남아있건 주어진 삶에 순명코자 하셨다.

 

   저는 나이도 많고 오랜 병고病苦로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습니다. 제가 쓰는 수필이란 것도 할 일 없으니까 세월 보내는 방편方便으로 간혹 희필戱筆 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저 누구에게 편지 쓰는 셈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수필다운 글이 나올 리 없습니다. (1996. 1. 23. 편지 중)

 

   선생은 그렇게 겸손하셨고 어떤 욕심도 갖지 않으셨다.

 

   선생은 2003년 세상을 뜨셨다.
   2003년 12월 23일에 돌아가시어 성탄절날 발인을 했다고 한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아름답게 퍼지는 그 축복의 날에 선생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88세, 미수米壽였다. 그즈음 난 가장 바쁜 때이기도 했지만 선생의 부음을 듣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알게 되어 얼마나 죄송하고 안타까웠는지 모른다.
   돌아가시기 3개월여 전 통화를 했었다. 2003년 9월 말경 한국현대수필작가 대표작선집으로 나온 ≪숨어있는 향기≫란 선집을 보내드렸는데 내가 직장에 나가 있는 사이에 집으로 전화를 하셨던가 보다. 책 잘 받았다고 꼭 전해 달라고 하셨단다. 저녁에 들어와서 전해 듣고도 너무 늦어서 전화를 드리지 못하였는데 다음 날 또 전화를 하셨더란다. 아무래도 전해달라고 하는 것도 인사가 아닌 것 같아 직접 통화라도 하려고 다시 하셨단다. 그러나 그 전화도 내가 받지는 못 했다. 다음 날이 토요일이라 조금 일찍 집에 들어왔는데 또 전화가 왔다.
   선생께선 숨이 가빠 하셨다. 글을 쓰는 사람이 몇 자라도 펜으로 써서 축하와 감사를 해야 도리인데 병중에 누워 있어서 그러지 못해 목소리로라도 직접 축하를 하고자 하셨단다. 그러면서 일어날 수도 없어 전화를 걸어달라고 하여 누워서 전화를 하고 있는데 이해해 달라고 하셨다. 너무나도 죄송하고 감사하고 부끄러웠다. 아들 벌의 후배 수필가인데 그토록 병고 속에서도 치하를 해 주시려는 그 마음은 ‘너도 이렇게 해라.’ 하시는 말씀으로 들렸다.
   수필은 품격의 글이요 인격의 글이다. 모헌 선생의 그런 삶의 자세, 글을 쓰는 이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배려는 선생의 수필이 바로 그런 결정체였다. 작품 속에 작가의 인격이 투영되거나 녹아나는 수필, 특히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읽다 보면 선생이 살아오신 삶 전체가 파노라마처럼 흘러가며 보여진다. ‘글이 곧 사람’이라는 말은 이런 때, 이런 분을 두고 하는 말일 것 같다. 조금은 길고 사설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작품이지만 난 선생의 이 수필을 읽고 있으면 다정하게 편지를 써서 보내 주시고 아픈 중에도 전화를 걸어 격려를 해 주시는 선생의 인품 곧 ‘사람됨’이 선연히 눈에 보이는 것 같아 좋다.
   한 편의 수필이 읽는 이에게 전해지는 것은 가슴에서 가슴으로다.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읽고 있으면 그분의 삶의 순간들이 자란자란 전해져 온다. 그리고 조곤조곤 말씀이 되어 ‘그리 살아라.’고 말한다. <이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너희는 더 늦기 전에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말씀으로도 들린다. 좋은 수필의 힘이다. 선생은 그렇게 가장 오래 남는 향기로 수필 <다시는 봄을 기다리지 않는다>를 남기셨다.

 

 

최원현  --------------------------------------------------
   수필가·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문인협회 이사, 사)한국학술문화정보협회 부이사장, 사)한국수필가협회 감사, 한국수필작가회장(역임), 수필세계·좋은문학·에세이포레·건강과생명 편집위원, 한국수필문학상, 동포문학상대상, 현대수필문학상, 구름카페문학상 수상 외.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문학에게 길을 묻다≫ 등 13권.

 

 

 

출처 : 신아출판사
글쓴이 : Shina wow 원글보기
메모 : 박규환의 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