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현]
들어가며
한 편의 좋은 수필을 읽게 된다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문학이란 사람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도 모질고 삭막한 느낌만 드는 요즘 같은 시대에선 무언가 의지하고 싶고 위안거리를 삼고 싶다는 소망 중 하나가 아닐까 한다.
문학은 시대의 흐름 앞에서 선견적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삶을 뒤돌아보며 반성케도 하고 사유를 통하여 인간의 정을 품거나 나누게도 한다. 그런 면에서 수필은 다른 문학보다 더욱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문학이요, 가장 삶적인 문학이요, 삶과 가장 가까울 수밖에 없는 문학일 것이다. 더욱이 수필은 자기 체험을 근간으로 진실하고 솔직하게 그 체험을 조명하며 그것을 문학으로 승화시킨다는 점에서 가히 대표적인 삶의 문학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체험적 삶이란 무엇에서 시작하는가. 바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온 이야기일 테니 고향과 유년과 지나버린 것에의 그리움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대부분 태어나 자라면서 고향과 유년의 터를 떠나 살게 되고 그 과정에서 문명과 반문명의 얽힘 속에 긴 유랑도 하게 되며 그 유랑 중 나이가 들다보면 회귀본능이 발동하여 회향을 꿈꾸게 된다.
이런 일련의 삶의 과정이 문학이란 이름으로 그려진 한 폭의 그림이 되는데 그런 그림 중 하나 그게 수필집일 것이다. 그래서 한 권의 수필집 속엔 그의 삶과 함께 해 온 그가 살아온 시대, 문명 그리고 희로애락이 담겨있는 것이요, 그것은 곧 그가 속한 시대의 산물로 그를 통해 피워진 삶의 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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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욱 수필집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인간다운 문학의 성정을 그리고 있다 할 것이다. 『움직이는 고향』(1976),『인간속의 흔적』(1990),『임대마차』(2004) 등 그의 수필집 제목만 보더라도 그의 수필문학이 추구하는 방향성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바로 작가가 말하는 회향, 방랑, 반문명은 허세욱 문학의 중심이고 사상이고 철학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간과치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 모든 것이 지극한 인간애에서 비롯되고 인간애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허세욱 문학의 중심에는 바로 이런 인간애 곧 인간사랑 특히 생명에의 소중함이 깊이 뿌리내려 있다.
허세욱 수필집『송정다리』의 주요 메시지
허세욱의 수필은 윤곽이 아주 뚜렷한 얼굴의 사람 같다. 말하자면 한 번만 보면 다음번에 만나도 바로 기억할 수 있게 하는 친밀감이랄까. 그의 수필에선 바로 그런 친밀감이 근친간의 가까움 이상으로 짙게 느껴진다. 그 어떤 동류항을 느끼게 하는 친밀감의 정체, 그게 아마 그의 수필이 내면적으로 깔고 있는 주제성의 실체이기도 할 것이다.
『송정다리』는 가장 최근의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 1부에 10편, 2부와 3부에 각 9편, 4부에 11편 도합 39편을 싣고 있는데 해가 넘어가는 저녁 해으름을 연상케 하는 작품들이 1부 역전경기에 묶여있고, 2부 여덟 사나이엔 삶의 단상들이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 3부 소나무야 소나무야는 방랑의 단원이다. 움직이는 단상들이다. 그리고 4부 고향나그네는 회향이다. 그렇게 보면 허세욱 수필은 자연적인 쓰임보단 의도적 쓰임의 냄새를 풍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그렇지가 않다. 모든 작품에서 구성을 중요시 하는 그만의 수필법 때문이다. 정형시적 구조를 갖춘 치밀한 구성을 수필마다에 적용한 때문이다. 그러면서 일관되게 주제의 흐름을 잡고 있다. 곧 허세욱 수필의 특징이다. 그의 소재나 주제는 지극히 정감이 넘치는 것들이다. 바로 우리 것, 우리 속에 내재 내지 잠재되어 있어서 그냥 ‘우리’였던 것들이다. 그러면서 그 ‘우리’를 느끼게 하는 것들이 또 매우 다양하다. 평범한 것들을 평범하지 않게 하는 그만의 창의력이고 수필의 품격을 높이려는 의도화 된 수필법의 능력에서 나온 결과들이다.
허세욱 수필의 주요 제재는 고향과 천륜, 자연과 무위이다. 그것들을 그리워하고 순응하는 것을 숙명이요 신앙처럼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서 허세욱의 문학은 그러한 숙명적 순응과 결합으로 고향이란 제재의 산실을 통해 그만의 신앙을 확립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재나 주제는 한국적 전통정서에 바탕 했다. 수필의 영역을 확대하면서 풍격(風格)의 제한을 거부하는 수필인지라 소제나 주제도 그에 따라 다양한 셈이다’- 自辯의 글-라고 했듯이 그의 수필은 정통을 지향하면서 맛깔나고 모양 나는 퓨전으로 영역을 확대하고 전통적 가치를 현대감각에 맞게 조화를 시도하면서 수필의 격을 높인다. 그런데도 그의 근본은 흔들림이 없다. 허세욱 수필의 경향은 한상렬의 표현처럼 ‘인간 원점에 대한 연민과 사랑, 자연친화적 반문명주의적인 저항의식, 여행과 방랑을 통한 자유 의식, 심미적 기능의 포착 등으로 대별’ 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그림그리기를 수필에 도입한다.
허세욱은 1934년 7월 26일 전북 임실의 삼계 덕계리에서 태어났다. 1959년 한국외국어대 중어과를 졸업한 후 중화민국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대만 국립사범대 대학원 중문과에 입학하여 63년에 문학석사, 68년에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9년부터 1986년까지 한국외국어대학에서 중국어과 교수로 있으면서 1983년 미국 IOWA대학과 1984년 U.C 버클리대학에서 방문교수 및 특별연구원 생활을 했다. 1986년 이후로는 고려대학교 중문과 교수로 중국문학의 권위자로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다가 퇴임하여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지금에야말로 그는 수필가로만 있다 할 것이다.
아침 여덟시쯤 내 고향 가는 삼계행 버스를 탔다. 날이 꼬무레했다. 내가 뼈를 묻을 덕계리 동구인 송정에 내렸다. 불과 20분이면 오는 것을, 나는 터벅터벅 걸었다.
― 164쪽, <고향 나그네> 중
그가 구사하는 언어들이 유난히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도란도란 정감어린 대화 같기 때문이다.상황을 묘사해도 그는 조근조근 말하듯 한다. 홋잣말 같기도 한데 혼자가 아니다. 혼자인 것 같은데 늘 누군가가 있다. 어느새 작가와 독자가 벌써부터 동행이다. 그래서 분명 혼잣말을 하는 줄 알았는데 혼잣말이 아니라 독자와 도란도란 얘기를 하고 있거나 어느 사이 독자가 그의 옆에서 맞장구를 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의 발자국 소리는 늘 하나가 아닌 둘이었고, 그의 말소리엔 또 하나의 말소리가 담겨있다.
그의 수필을 읽다보면 마냥 손이 바빠지게 된다. 그가 넘겨 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려야 하기 때문이다. 속도를 천천히 해 읽어야지 빨리 읽어 가면 내 손이 따라갈 수가 없다.
내 고향 모갈로 들어가는 동구 송정에는 달랑 주막 한 채가 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부옇게 먼지를 둘러쓰고 있는 방앗간, 그것도 달랑 한 채였다. 주막과 방앗간 그 겨드랑이로 수십 그루의 동그란 수양버들과 꺼벙한 키의 사시나무가 히뜩히뜩 줄기를 드러내고 섰다. 바로 그 아래로 노산치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이 졸졸거렸다. 그 위로 20m 남짓한 철근 콘크리트 다리가 남북으로 걸쳐 있었다. 북쪽 동냥어치 고개로 부터 헐떡거리며 내려오는 신작로와 남쪽 탑전 고개로부터 신나게 미끄러져 온 신작로가 여기서 악수하면서 모처럼 가쁜 숨을 고르고 있다.
― 75쪽 <송정다리> 중
고향 입구를 묘사한 표제작 <송정다리>의 도입부다. 주막 한 채가 있는데 ‘그것도 달랑 한 채’이고, 주막/방앗간/동그란 수양버들/꺼벙한 키의 사시나무/시냇물/철근 콘크리트 다리/헐떡이며 내려오는 신작로/신나게 미끄러져 온 신작로, 이쯤 되면 아무리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동구 송정의 모습을 눈으로 보듯 그려낼 것이다. 그런데 그 뿐이 아니었다. 그의 묘사는 그야말로 생동감이 넘친다.
어스름 저녁, 소를 몰고 돌아오면 신작로는 하얀 가래떡처럼 낭창낭창 휘어졌고, 초승달 푸른 달빛 아래서 휘휘 둘러보면 차라리 승무僧舞 하는 긴 명주 수건이었다.
― 76쪽 <송정다리> 중
눈앞에 생생하게 나타나게 하는 묘사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온 몸, 온 마음으로 느끼는 묘사다. 그 묘사 속에 고향에 대한 애착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인간 허세욱의 삶이 녹아있다. 그 송정다리는 희망의 세계와 현실이 함께 하는 부두 같은 곳이었고, 그래서 전송의 마당이고 마중의 마당이고, 기다림의 마당이고 돌아옴의 마당이었다. 이제는 모습을 찾을 수도 없게 되어버린 그 옛 다리처럼 60년의 세월은 다시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작가의 가슴 속, 기억 속, 삶 속에는 그 옛날 그 다리로 여전히 남아있다. 다만 현실적으로 그 다리에 가 있지 못하는 안타까움의 지금이지만 그곳은 그가 언젠가는 가 있어야 할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수필집《송정다리》에는 그런 애상적 수필이 여럿 눈에 띤다. <까치집> <선정릉 퇴장시간> <묶이며 놓이며> <저 바람소리가> <고향 나그네> 외에도 그의 수필들에선 그런 애상이 많이 느껴진다.
‘호젓한 산모퉁이에 서면 숨은 듯 초가집 지붕 옆으로 몽글 몽글 작은 굴뚝에서 연기를 만날 차례인데’
‘희미한 불빛 사이로 도란도란 말소리에 딸그락딸그락 숟갈 소리가 들릴 때인데’
‘서쪽으로 남아있는 서러운 노을빛’
‘삶이나 목숨이란 것이 기껏 나뭇가지에 잠시 붙어산다는 것을 짐짓 알고 있는지’
― 이상 <까치집> 중
그가 바라보는 것들에 눈을 맞추면 가슴이 아릿해 진다. 서럽도록 아름다운, 슬프도록 사랑스러운 정경들이 가슴에 안겨 든다. 당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반가움과 기쁨으로 온 몸이 뜨거워져 버린다. 그래서 그것이 부끄러운 것이 되고 체면을 잃는 것이 되더라도 아랑곳 않을 만큼 그의 수필은 읽는 이를 천연스런 아이 같이 만들어 버린다.
허세욱은 1956년 자유문학사가 주최한 전국대학생 시 콩클에서 시가 당선되고, 1961년 자유중국의《현대문학》지에 중문 시 2편을 발표하는 등 시인으로 등단했던 시인이다. 그러나 그는 자유중국《작품》지에 중문수필 2편이 추천되고, 1972년 창간된 《수필문학》(발행인 김승우)의 주간 박연구에 의해 필진으로 참여케 되면서 수필가로 활동한다. 그래서인지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늘 예사롭지가 않다. 그런데 그 눈은 독자를 그렇게 만드는 만큼 아이의 눈 마냥 천연스럽다. 자라기를 거부하는 피터 팬처럼 결코 늙지 않을 어른 아이, 그의 마음은 어린 날 고향에서 뛰놀던 그 때로 나이 든 지금에도 오락가락 한다.
허세욱 수필의 소리, 빛깔, 향기
허세욱 수필은 지극히 서정적이다. 그러면서도 그 서정 속에는 서사가 넘친다. 서사가 서정 속에 녹아있는 수필, 그게 허세욱 수필의 맛일 것이다. 그의 수필에는 그만의 소리와 빛깔과 향기가 있다. 그는 자신의 수필 주제를 세 가지로 말한다.
‘내 수필이 우려먹는 뼈다귀는 지금도 회향(懷鄕)과 유랑, 그리고 반문명 세 가지다. ...그 중에도 회향이 등뼈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절절하다. ...시간적으로 원점이 멀어질수록 기억은 새로운데 막상 고향 그 자리에 서면 낯선 나그네가 된다. 고향집은 날로 황폐하고, 눈 익은 우물가에는 새로운 얼굴들이다. 그래서 고향은 찬비에 젖고 나는 때마다 훌쩍 떠나왔다. 징검다리였던 송정다리가 철근 콘크리트 다리로 바뀌었을지라도 나의 고향 사랑과 지구의 유랑은 계속될 것이다.
― 허세욱 수필집 《송정다리》머리말 중
그랬다. 허세욱은 두려움을 안고 있다. ‘원점이 멀어질수록 기억은 새로운데 막상 고향 그 자리에 서면 낯선 나그네’가 되는 두려움은 겪어보지 않으면 그게 얼마나 큰 두려움인지 모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듣는다.
‘우릴 반길 부모님은 벌써 세상을 Em셨고, 형제조차 그곳을 떠난 지 벌써 수십년이라 내 생가는 앙상한 형해만 남은 채 벌써 40년이 넘게 씽씽 바람만 불었고, 내가 성장했던 새 집은 아직도 다섯 칸 접집의 큼직한 몸체에 더덩실 까만 기와를 이고 있지만 60년 풍우에 늙었음인지 해마다 쪼그라들고 있다.
― 41쪽 <가끔 혼자이고 싶다> 중
40년이 넘게 씽씽 불던 바람소리, 그건 그의 유랑 속에서 맞던 바람소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수필이 내는 소리는 그런 차갑고 매섭고 강한 것만이 아니다. 그는 지극히 자연한 우리의 것들이 내는 소리를 듣는 맑은 귀의 소유자다. 그는 귀뿐 아니라 눈으로도 듣는다.
‘한 잠을 자고 난 누에가 사각사각 뽕잎을 먹듯, 얼마쯤 걸었을까? 얼마쯤 먹었을까? 눈이 가물가물하고 팔이 시큰시큰 했다. 버드나무가 우거진 나루터, 거기 산 그림자가 누워있는 물안개 저편으로 가면, 삐걱삐걱 노 젓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저들 물이 소리없이 흘러가듯 나도 가자. 빠이빠이 나는 손사래 했다.
― 211-212쪽 <침등> 중
잠자리에서 침등을 베갯머리에 앉히면서 맞는 잠, 그건 삶의 날을 다 지나고 영면을 하는 순간도 그렇게 평온하길 바라는 그의 소망일지도 모른다. 그는 그렇게 삶을 한잠 자고 난 누에가 뽕을 먹는 소리, 버드나무 우거진 나루터에서 버드나무가 만들어내는 소리와 작은 배가 거기 덩달아 흔들리다가 누군가 손님이 있어 타게 되면 강을 건너는 노 젓는 소리며, 물살을 거스르거나 따라 흐르며 나아가는 나룻배와 물살 소리, 그렇게 자연하게 살다 자연하게 가고 싶다는 소망일 테니 그에게 소리는 삶이 오는 소리요, 사는 소리요, 가는 소리이다.
그런가 하면 그의 수필은 또 빛깔이 선명하다.
허세욱의 수필세계는 시종 고향, 자연, 생명, 그리고 방랑성을 그 중심 화두로 삼고 있다. 그의 수필세계는 풍요로운 중국문학의 전문성에 바탕한 동양사상의 전통적 가치관의 현대화와 세계적인 보편성 추구에 뿌리 내리고 있다.
그의 수필은 학자들이 흔히 함몰되기 쉬운 연구실의 낙수나 논문의 각주를 닮은 현학성의 나열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언저리에서 빚어지는 감상과 사유의 소요학파적인 구도를 형성하고 있어 대중적인 공감대를 확보하고 있다.
작품의 주조는 시적인 서정성에 바탕하고 있으며, 문장은 잘 직조된 융단처럼 다양한 채색으로 매끄럽고, 단어의 선택은 우리 민족 정서에 농익은 고품격의 한자술어들을 토착어처럼 잘 어울리게 한글과 조화롭게 공존시켜 놓는다.
― 임헌영의 <조경희수필문학상> 심사평에서
임헌영 교수가 제1회 조경희수필문학상 심사평에서 평하였듯이 허세욱 수필은 ‘일상적인 삶의 언저리에서 빚어지는 감상과 사유’로 대중적인 공감대를 확보하기까지 ‘잘 직조된 융단처럼 다양한 채색으로’ 빛깔을 통해 독자를 사로잡는다.
‘회화나무 신록의 그림자가 섬돌을 지나 마루로 올라와선 지금 막 방마다 두 쪽의 하얀 영창 그 낮은 격자에 발을 딛고 있었다. 아직 상현 달빛인데.
― 17쪽 <그림자> 중
고향집 사랑 앞 백년도 넘은 회화나무 그것은 허세욱 고향의 기둥이요 주추였다. 백년이 넘게 지켜온 것처럼 앞으로 백년, 이백년도 그리해 줄 것으로 믿는 믿음이기도 했다. 신록의 그 그림자도 파란색일 거였다.
'소나무 밑둥에 소복이 쌓인 누런 솔잎을 긁어모아 거기다 성냥을 그었다. 잿빛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오징어가 다리를 비틀비틀 꼬기 시작했다. 우리는 바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홀짝거렸다.'
― 24쪽 <첫눈이 오면> 중
눈꽃이 너울거리는 겨울 한 날, 마음 맞는 친구와 절간 뒤 바위 위에서 내리는 눈을 맞으며 손으로 긁어모은 누런 솔잎 불에 오징어를 구워 안주로 삼고 소주잔을 들이키는 한 폭의 그림을 그려보라. 정겨움보다 혹시 지금 눈이 내리고 있지 않나 밖을 내다보며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어지게 한다.
허세욱 수필의 또 하나 맛과 멋은 수필이 품어내는 향기다. 어머니란 이름을 입속으로 되뇌기만 해도 어릴 적 품안에서 맡던 어머니내가 느껴지듯 허세욱의 수필은 수필마다에서 독특한 사유의 삶내를 풍겨낸다. 그의 <사고(四苦)>를 보면 우리는 괴롭게 만났다, 우리는 괴롭게 읽었었다, 우리는 괴롭게 떠돌았다, 우리는 지금 괴롭게 헤어지고 있다며 네 가지의 괴로움을 표하고 있는데 그것은 애장서적 1만 권중 삼천 권은 고향 군립도서관에, 7천권은 모교로 보낸 것에 대한 그의 소회다.
대만의 고물상 좌판으로부터 홍콩의 초대형 서점가 그리고 뉴욕 및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 고서점을 돌며 모은 책들을 50년 동안 품고 밀고 끌고 다니다가 종내는 이별을 해야 하는 마음이니 그것을 무엇에 비길 수 있으랴.
‘봄, 여름, 가을, 겨울 같은 지극히 자연스런 순환이었지만 나와 나의 책들 사이의 만남과 이별은 한 번뿐이었다.’
― 99쪽 <사고(四苦)> 중
그에게서 떠나간 것은 책이 아니었다. 바로 ‘나의 50년도 저 편 골목으로 사라지는’ 아픔이요 안타까움이었다. 그런데 그의 수필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그리고 긴 여운으로 남는 것은 바로 그런 수필이 풍겨내는 그만의 향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버린 것, 더난 것, 없어진 것들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태로든 새로운 생명을 여는 일로 이어지거나 동참한다고 보았다.
무엇이든 사라지면서 한 줌의 흙으로 남는다면 그것은 언젠가 한 포기 풀잎으로 솟아날 것이다. 그것을 굳이 영원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줌의 흙이 되는 일은 결코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74쪽 <흙 한 줌> 중
‘무릇 떨어진 것들은 그 자리를 떠나거나 그 모양을 잃을 때 더욱 아름답다. 꽃은 떨어져서 흙이 되고, 물은 떨어져서 흰 꽃을 피우고, 잎은 떨어져서 두덩을 만들 듯’
― <떡갈잎 한 장> 112쪽
허세욱은 이 땅에 있는 것,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으로 변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것이야 말로 허세욱의 생명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요 염원이다.
결국 허세욱은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에 대해 그의 수필의 소리와 빛깔과 향기로 스스로를 알리면서 제 몫들을 해내게 하고 있으며, 사람은 그들과 조화하여 움직이는 큰 그림을 이루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가며
허세욱의 수필은 종합문학이다. 장르가 구분된 문학의 영역에서가 아니라 시를 어우르고 번역을 품고 수필이란 이름으로 자전적 체험소설을 이뤄낸다. 중국에서의 그의 생활은 향수, 한국인, 문화적 콤플렉스와 학업 난을 치유하는 치료법으로 번역을 했다지만 그걸 기초로 하여 그의 문학적 기반이 탄탄해 진 것이었으니 가장 완벽한 기초 다지기가 되었을 터였다. 거기에 시를 더했고, 그런 다음 수필에 전념케 되었으니 그의 수필이 그냥 빚어진 것 같아도 늘 탄탄한 구성이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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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방하고 선이 굵고 이야기의 뼈대가 확실하고, 문장에는 색체와 선이 분명하고 지적 풍부함에 깊이 있는 서정성, 시적 리듬과 상징성 및 음양, 원근법이 선명한 그림으로 입체감이 넘치는 완숙한 수필이 바로 허세욱 수필이 아닐까싶다.
『송정다리』는 그런 허세욱의 완숙된 모습을 보여주는 수필집으로 손색이 없다. 마침 이 수필집으로 제1회 조경희 수필문학상을 수상 했으니 그 또한 우연이 아닐 게다. 회향과 유랑, 반 문명, 고향 자연 생명 방랑성, 전통의 가치관 속에서 추구하는 현대화와 세계적인 보편성의 허세욱 수필은 어쩌면 우리 수필이 안고 있는 수필을 보다 문학이게 하는 큰 과제를 푸는 방법을 제시했다고도 볼 수 있다.
■ 최원현
문학평론가. 한국수필작가회 회장
[격월간《수필과비평》2009년 1/2월호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