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등단 40주년을 맞이하셨던 소설가 박완서씨(80) 선생님이 1월 22일 새벽 5시20분 경기 구리시 아차동 자택에서 지병인 담낭암으로 돌아가셨다.
가슴이 다뜻해 지는 문장과 이야기들로 문학 이전에 사람의 정을 느끼게 해 주시던 선생께서도 우리 곁을 떠나셨다.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마지막 배웅을 받고 계시는 선생님,
나는 선생님의 첫 작품 [나목] 이후 자신의 희망 전부였던 아들을 의사로까지 키워냈는데 한 순간에 잃어버린 후
'주님, 당신이 과연 계시다면, 계신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왜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 한말씀만 하소서"였습니다.' 하며 일기로 그려낸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본 것 같다.
장지는 용인천주교공원으로 발인은 25일(화)이란다. 삼가 선생의 가심을 애도한다.
1931. 10. 20 경기 개풍~.2011. 1. 22.
소설가. 대중인기작가이면서 문학성도 뛰어난 작품을 발표했다. 1944년 숙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호수돈여자고등학교로 전학했고 해방이 되자 다시 숙명여자고등학교로 돌아왔다. 이때 한말숙·박명성 등과 사귀었으며, 담임교사인 월북 소설가
박노갑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50년 서울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6·25전쟁으로 학교를 그만두었다. 오빠와 삼촌이 죽자 생계를 잇기 위해 미8군 PX 초상화부에서 일했으며, 이때 화가 박수근을 알고 그의 그림에 감명받았다.
1970년 〈여성동아〉에 장편
〈나목 裸木〉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고, 이어 〈부처님 근처〉(현대문학, 1973. 7)·〈주망농장〉(문학사상, 1973. 10)·〈겨울나들이〉(문학사상, 1975. 9) 등 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1976년 〈동아일보〉에 〈휘청거리는 오후〉를 연재했다.
수필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1977)·〈서 있는 여자〉(1985)에 이어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1989)를 펴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자리를 굳혔다.
40세의 늦은 나이로 출발하여 20년 동안 100편 안팎의 소설을 썼으며 많은 문제작품을 써냈다.
6·25전쟁의 아픔과 분단의 사회현실을 그대로 그려내고 개성을 잃어가는 순응주의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1980년 한국문학작가상, 1981년 이상문학상을 받았다.
데뷔
경력
2004 ~ |
예술원 회원 |
1996 ~ |
공연윤리위원회 위원 |
1996 ~ |
토지문화재단 발기인 |
1996 ~ |
제27회 동인문학상 본심 심사위원 |
1995 ~ |
문학의 해 조직위원회 회원 |
1993 ~ |
국제연합아동기금 친선대사 |
1993 ~ |
유니세프 친선대사 |
수상
2006 |
제16회 호암상 예술상 |
2001 |
제1회 황순원문학상 |
1999 |
제14회 만해문학상 |
1994 |
제25회 동인문학상 |
1981 |
이상문학상 |
출처 : 솔샘문학회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