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병(甁) / 최원현(崔元賢, 1951-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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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부쩍 눈물이 많아졌다. 지천명의 나이를 넘긴 처지인데도 왜 이리 실없이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남자가 말이다. 크게 슬프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있어서도 아니고 그저 마음을 찡하게 하는 아주 작은 일들에 곧잘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니 더욱 민망하기도 하다. 어쩔 땐 체널을 돌리다가 잠시 보게 된 T.V의 만화영화에도 찔찔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보도되는 조금의 감동스런 얘기나 뉴스에도 실없이 눈물이 나오곤 하니 누가 볼까봐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다. 집에서야 그래도 이미 다들 아는 상황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남들과 여럿이 있을 때나 마주앉아 상대의 얘기를 듣다가도 눈물이 흘러나와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슬그머니 안경을 닦는 척 하며 눈물을 훔치기도 하지만 눈물이란 게 그렇게 한 방울 똑 떨어지고 마는 게 아니잖는가. 더구나 눈은 하나가 아니고 둘이 아닌가. 이야기를 듣거나 T.V를 보다가만 그러는 게 아니라 책을 보다가도 그런다. 감동스런 글엔 예외 없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온다. 큰 감동이 아닌 사소한 아주 작은 감동, 나는 그런 것들에 더 약한 것 같다. 오늘도 배달되어 온 수필 전문지를 펼치다 한 곳에 눈이 머문다. 내가 썼던 수필 제목이 아닌가. 그리고 작가는 내가 그 제목으로 수필에 썼던 B선생이 아닌가. 내가 썼던 수필에 대한 답 수필인 셈이었다. 언제나 가슴으로 흐르는 정의 수필을 쓰는 분, B선생의 수필을 읽고 있으면 그 의 감성의 바다에 나도 몰래 빠져버리거나 둥둥 떠 있는 것을 느낀다. B선생의 심성 가득 넘치는 부드러움과 따스함이 수필 속에서도 나를 감동시킨다. 나는 얼른 T.V를 켰다. 마침 좋은 나라 운동본부가 자랑스런 시민을 찾아내어 금메달을 걸어주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얼른 T.V로 내 눈을 가져가는 척 하며 기회를 놓칠세라 눈물을 훔친다. 그리고 읽던 수필을 마저 읽는다. B선생의 진정 넘치는 마음 씀이 가슴 가득 안겨온다. 그래서 그의 수필을 읽다보면 곧잘 그런 잔잔한 감동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이런 나를 보고 ‘아빠 왜 울어?’ 하곤 물었었다. 그러다가 조금 더 커서는 ‘아빠 또 울어?’ 하더니 나이가 더 드니까 우는가를 확인하는지 가만히 나를 바라보기만 하더니 요즘은 아예 ‘이쯤에서 또 눈물을 흘리실 거야’ 확인할 필요도 없다는 것인지 이제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런 내가 참 부끄럽게 여겨질 때가 있다. 너무 여린 아빠의 모습, 더러는 감동만 할 뿐 그에 따른 실천의 변화가 따라주지 못하는 아빠로 아이들에게 면목이 서질 않아서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선 오히려 그에 대하여 고마워하고 있다. 아직까지 그나마 내 감성이 돌멩이처럼 차가와 지거나 딱딱하게 굳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스스로의 위안 때문이다. 슬픈 것도 기쁜 것도 안타까운 것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무감각해 져 버린다면 그 또한 얼마나 삭막한 일이며,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인가. 그런 면에서 신에게 감사한다. 그런 마음이라도 있기에 이만큼의 어줍잖은 글이라도 쓸 수 있음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우리 속담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란 게 있다. 지독히 인정머리 없는 사람을 일컬음이다. 눈물은 그만큼 피와 동격으로 쓰였다. 피가 생명을 의미한다면 눈물은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것이었다. 피만 있고 눈물이 없는 사람은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 일이 아닌가. 그래서 아무리 마음이 닫혀있고 굳어있는 사람이라도 눈물의 용서와 이해를 구하면 대개의 경우 그 마음을 풀곤 하는 게 아니던가. 눈물은 순수요 정직이요 진실이라 믿기 때문이리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눈물을 흘릴 일이 얼마나 될까. 대개의 경우 눈물은 슬플 때 흘리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기도 할 것이다. 우리 삶이란 게 기뻐서 우는 것보단 슬퍼서 우는 때가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삶이란 게 고통과 아픔과 슬픔의 연속이요 그런 것들이 더 잘 기억되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그런 슬픔과 고통을 얼마나 잘 참고 이기느냐가 아닌가. 옛 이스라엘엔 ‘눈물 병(甁)’이란 게 있었다고 한다. 슬픔의 눈물을 받아두는 병이었다. 대개 얇은 유리로 만들어졌는데, 크기도 다양하여 보통 7~8cm에서 20cm라고 한다. 바닥이 넓고 몸통은 호리호리하며 아구가 깔때기 모양으로 생겼는데, 가난한 사람들은 단순한 토기로 만든 것을 사용했다고 한다. 가정에 어떤 재난이 생겼거나 마음이 상하여 눈물을 흘리게 될 때 흐르는 눈물을 모아 보관하는 병이라는 것이다. 식구들은 제각기 눈물 병을 하나씩 갖고 있어서 슬픈 일로 눈물을 흘리는 동안 눈 아래에 자기의 병을 댐으로써 흐르는 눈물을 병에 담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병을 밀봉하여 집안의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보관했다가 자신이나 가족, 친척 중에 재난이 생기면 그 눈물 병을 챙겨 재난이 일어난 곳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눈물 병은 매우 소중하게 간직하고 성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어느 누가 죽으면 그 사람의 눈물 병을 함께 매장했는데 만일 실수로라도 자기의 병을 깨뜨리거나 그 안의 눈물을 쏟게 되어 풍습대로 함께 매장하지 못하게 되면 씻을 수 없는 수치로 여겼다고 한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그만큼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요, 이해하고 함께해 줌인 것이다. 속마음이 나타난 것이 눈물이 아니던가. 그래서 어떤 학자는 기쁠 때 흘린 눈물과 슬플 때 흘린 눈물을 분석해 보았더니 성분이 다르게 나왔다고 했다. 아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눈물 병은 자신과 가족들 삶의 애환, 희로애락이 담겨진 것이니 그토록 소중히 할만하다. 눈물 병을 함께 매장한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일생 희로애락의 삶을 함께 묻어준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눈물이란 땅 위에 사는 척추동물의 누선(淚腺)에서 나오는 분비액으로 사람의 경우에는 눈꼬리(外眼角)에 가까운 윗눈꺼풀(上眼瞼) 뒤의 눈물샘(누선) 및 그 부근에 산재하는 부누선에서 결막낭 안으로 분비되는 투명한 액체이다. 각막과 결막을 항상 적셔주어서 이물을 씻어냄과 동시에 각막 상피에 포도당과 산소를 공급해 주는 일을 한다고 한다. 또, 이산화탄소 등 그 밖의 노폐물을 받아내고, 용균성(溶菌性) 효소인 리소좀이 포함되어 있어 감염방지작용을 하는 것으로서 이 눈물은 내안각(內眼角) 눈물의 호수(淚湖)에 모였다가 누점(淚點)•누소관(淚小管)•누낭(淚囊)•비루관(鼻淚管)을 거쳐 비강으로 배출되는데 하루 분비량은 1∼1.2mℓ이고 수면 중에는 분비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생후 3개월 이내의 신생아는 울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고 젊은 사람은 노인보다 분비량이 많으며, 여성이 또 남성보다 많다고 한다. 성분은 약알칼리성인데 슬플 때에 왜 많은 눈물이 나오는지도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눈물 때문에 결막염이나 누도(淚道)의 통과 장애 등으로 눈물이 너무 많이 나오거나 반대로 너무 적게 나오는 등 질병도 생긴다고 한다. 하여간 나는 이 눈물 때문에 심심찮게 애를 태우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단점이면서도 장점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이 눈물 병에 눈물을 모으듯 내 삶의 희로애락을 소중히 하여 내 삶을 마감할 때 나를 평가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기쁨과 행복만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픔과 고통의 기억이 더 귀하고 아름다울 수도 있다. 눈에 잘 들어오는 곳에 눈물 병을 올려놓는 것도 아마 삶 모두가 소중한 것임을 늘 인지하라는 것이 아니었을까. 뿐 아니라 눈물은 자신 때문에 흘리는 것도 있지만 가족이나 친지 등 다른 사람의 일로 흘릴 때가 더 많지 않던가. 우리가 책을 읽거나 남의 이야기를 듣거나 T.V나 영화를 보면서도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만 살아가면서 함께 하는 이들의 각양각색 삶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반성과 깨달음을 얻던가. 나이가 좀 들어가니 괜시리 서운해지는 것도 많고, 그만큼 쉽게 감동도 하는 것 같다. 자식들의 행동에도 마음이 크게 쓰이고, 작게라도 마음 써 주는 것이 보이면 그게 그리 고마워져 나도 몰래 눈물까지 나온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눈물 병을 마련해 두었던 의미를 알 것 같다. 좋은 일이거나 나쁜 일이거나 내 삶의 순간순간을 내 것으로 챙기고 받아들이면서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무덤까지 눈물 병을 가지고 가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과 같지 않을까. B선생이 서울 오실 일이 있으시다 했는데 갑자기 당장이라도 만나 뵙고 싶어진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만나게 되면 둘 다 눈물께나 흘릴 것만 같다. ‘눈물 병(甁)’은 없지만 ‘눈물 병(病)’은 있는 셈인가. ----------------------------------------------- 수필가 최원현(崔元賢)은 《한국수필》로 등단하여 한국수필작가회, 강남문인협회, kbs수필문학회, 열음詩 동인회에서 활동해 왔으며, 현재, 국제펜클럽회원, 한국문인협회 및 한국수필가협회 회원과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강남문인협회 수필분과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제5회 허균문학상, 제1회 서울문예상을 수상한 바 있고,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아침무지개가 말을 할 때》, 《살아있음은 눈부신 아름다움입니다》와 시집 《아름다울 수》를 내었으며, 다수의 공저 수필집이 있습니다. 《한국수필》 편집위원, 월간 《건강과 생명》 편집위원이며, 원로작가 인터뷰 연재, 재소자들을 위한 잡지에 칼럼 등을 연재하고 있기도 합니다. 2012년 저의 제 3수필집, <꽃구경> 서평을 맡아 주셨고 미주 해변문학제에 초청되어 오신 교수, 장로님이십니다. -김영교 |
출처 : 재미수필문학가협회
글쓴이 : 남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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