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나이가 들더라도 ‘어머니’란 호칭은 금세 부르는 사람을 어린아이로 만드는 것 같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서 일흔 나이의 늙은 아들이 조그마한 체구의 어머니를 포옹하고 그 가슴에 아이처럼 안겨드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야말로 우주보다 넓은 가슴을 지녔다고 생각했었다.
해마다 5월 이맘때가 되면 나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병을 앓곤 한다. 단 한 번도 어머니의 가슴에 카네이션 한 송이 달아드리지 못한 내게 카네이션은 오히려 안타까움의 꽃이요, 그리움의 꽃이 되었다. 어머니는 나이와 공간을 초월한 존재로 이 땅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서 자라고 있는 꽃이다.
「한 나무가 있었다. 나무는 한 소년을 사랑했다. 소년은 그 나무 가지에 올라가 놀기도 하고,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기도 하고, 여름에는 그 나무 그늘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나무도 자라고 소년도 자랐지만 사랑하는 소년에게 나무는 뭐든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나무는 가지를 잘라 주었다. 줄기도 잘라 주었다. 몸통도 잘라 주었다. 다 잘려버리고 남은 그루터기는 그가 쉴 의자가 되어주었다. 한 번도 나무는 소년을 원망하거나 미워해 본 적이 없었다. 그냥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쉘 실버스타인‘아낌없이 주는 나무’)」
어머니야말로 그런 아낌없이 주는 나무일 것이다. 초등학교 때였던가. 학교에서 어버이날을 맞아 카네이션 만들기를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없는 사람은 하얀색 꽃을 만들어 어머니 가슴 대신 자기 가슴에 달라고 했다. 헌데 우리 반에서 빨간 카네이션을 만들지 못한 것은 오직 나뿐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어머니가 빨리 돌아가신 것이 마치 내 탓이기라도 한 것처럼 어찌나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던지 그만 울고 말았었다. 어머니가 안 계신다는 것, 내가 어머니의 존재를 확실하고 크게 깨닫던 순간이었다.
그 후로 해마다 5월이 오면 나는 그 날 일이 생각나고 나는 늘 쓸쓸한 가슴이 되었다. 한 번도 어머니의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지 못한 안타까움은 이만큼 나이가 들고 스무 번 이상을 아이들이 가슴에 달아주는 꽃을 달았음에도 여전히 비어있는 가슴은 채우지 못하고 있다.
어머니는 생명의 고향이다. 고향의 뿌리이다. 자식들을 가장 안전하게 풀을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넓고 편안한 품이다. 어버이날, 자식들이 가슴에 달아준 카네이션을 달고 하루를 시작하는 이들은 행복한 이들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어머니의 가슴에 꽃을 달아드릴 수 있는 사람은 더욱 행복한 사람이다.
5월의 햇살이 어머니의 포근한 눈길 같다. “어머니, 가슴에 이렇게 꽃을 달아드릴 수 있는 어머니가 지금 이렇게 계시다는 것은 제게는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입니다. 어머니, 사랑합니다.” 나도 이 말을 한 번만이라도 해보고 싶다.
최원현/ 수필문학가. 칼럼니스트 http://essaykorea.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