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혜자의 음악에세이 6
살구꽃 필 때
정경화의 <브람스의 바이올린협주곡>
유 혜 자
신록이 뭉게구름처럼 다보록한 우면산 자락, 예술의 전당에 와 있다. 초록의 의연한 상록수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새로 피어난 작은 잎새들에게 타이르고 있는 듯하다. 바람이 잦아들면 조용히 귀를 열고 음악을 듣자고.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Vladimir Ashkenazy 1937-)가 지휘하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정경화의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D장조 작품77) 연주(2010년5월4일)를 기다리고 있다.
60년대 초, 연록의 잎새 같은 정경화(Kyung-wha Chung 1948)가 유학 떠나기 전 언니들(플루트의 명소, 첼로의 명화)과 가졌던 명동 국립극장에서의 연주회에 간 일이 있었다. 다부진 입매와 화살코의 예쁘장한 13세의 소녀(1961년)가 장학생으로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입학, 미국으로 간 후에 그의 집 앞(현 명동 계성국민학교 근처)을 지날 때면 안부가 궁금했다. 든든한 뒷받침 없이 촛불 밑에서 언 손을 불며 맹렬히 연습중이라는 소식을 들을 수 있던 동네는 연분홍 꽃핀 살구나무가 울타리 너머로 보이던 일본식집이 많은 주택가였다. 3·1로 개발로 동네가 자취도 없어진 것이 아쉽던 중, 1967년 이름 높은 리벤트리트 콩쿨에서의 우승소식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1970년엔 차이코프스키와 시벨리우스의 바이올린협주곡을 당당히 데카(DECCA)음반사에서 내고 세계 음악계에 데뷔하여 유럽 등에서 활발한 연주활동을 했다. 데뷔 음반에 수록된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협연)은 그 해 가을 실의에 빠져 있던 내게 예리하고 도전적인 표현으로 나를 부추겨주었다. 그 다음해에 내놓은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또한 불처럼 타오르며 격정적인 연주로 승리자로서의 희열을 맛보게 해주었다.
활화산이 가슴에 있는 것처럼 폭발적인 연소력으로 어떤 역경에서도 승리해야 하는 집념이 엿보이던 정경화, 그녀의 극적인 제스처도 멋있었다. 내가 지니지 못한 근성에 대한 환호라 할까. 시간이 흐르면서 탁월한 실력과 넘치는 박진감, 섬세한 표현력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마력의 소유자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는 것이 흐뭇하기만 했었다.
오늘의 레퍼토리인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의 바이올린협주곡은 사이먼 래틀과 협연한 정경화의 음반이 나왔었는데, 예리하고 선이 가늘 것이라는 선입견으로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중후하고 풍부한 표정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의 연주음반에 정이 들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5년 전 9월,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 예정이던 정경화의 나이든 연주를 듣고 싶었는데, 왼손 검지부상으로 갑자기 연주가 취소되어 안타까웠었다. 그때 안타까웠던 마음에 이제나 저제나 하고 복귀무대를 기다리다가 반가워서 달려온 것이다.
오랜만의 고국연주를 기다렸던 팬들과, 피아노의 귀재로 따뜻한 분위기를 만드는 지휘자 아쉬케나지와의 협연을 기대한 관중들의 열기가 장내를 꽉 메웠다. 키 작은 아쉬케나지가 오케스트라의 큰 울림을 자제하라는듯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자 청초한 바이올린 소리가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비집고 울려나왔다. 어쩌면 처음 듣던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소리처럼 가늘고 고와서 브람스의 포용력 있는 음악에 못 미치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1악장 마지막 부분에서의 미려한 카덴차는 신들린 여신의 기량을 확인시키려는 듯했다.
2악장 서두에서 목가적인 오보에의 선율이 너무 좋아서 뒤에 나올 바이올린의 소리가 염려된 것도 잠깐, 늠름하고 고운 바이올린 선율을 계속 들으며 작곡가 브람스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가를 생각할 수 있었다. 드보르작 등 묻혀 있는 실력자들이 빛을 보도록 작품을 출판하게 도와주어 그들의 음악이 알려지게 하고, 자신을 음악계에 소개한 슈만이 돌아가자 그의 자녀를 극진히 돌보고, 클라라를 보호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노년에 길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려고 주머니에 사탕을 두둑히 넣고 나가,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좋아하는 브람스의 정경을 떠올리는 동안 2악장이 끝나버렸다.
청중을 휘어잡는 정경화의 연주에서 활을 긋는 제스처가 멋있고 마법의 소리를 내는 운지법이 어떻고 하는 외면상의 문제를 들추기에 그의 경지는 너무 무르익었다고나 할까. 젊었을 때의 패기와 발랄함보다도 폭넓고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음악이 지닌 색채, 풍요로운 곡 해석으로 다양한 음색을 풍부한 감정으로 다채롭게 표현하는 연주자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음악에 대한 사랑,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꽉 채워져서 전율스럽던 날카로움이 한결 부드러워진 것을 느낄 수 있다. 철학적이고 중후한 브람스의 음악에 대한 확신으로 그 속에 깊이 들어가 풍성한 표정으로 깊은 아름다움을 정열적으로 길어 올리는 연주에 몰두하여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겠다.
활달하고 웅대한 3악장을 끝내고 허공으로 활을 뻗치는 연주자에게, 다가와 손에 입 맞추는 지휘자 아슈케나지, 청중들의 기립박수가 계속되어 다섯 번의 커튼콜을 반복한 연주자는 손으로 커다란 하트를 만들어 답례하고는 앵콜곡으로 브람스의 협주곡 끝악장을 연주하고, 다시 바흐의 무반주 파르티타를 들려주어 청중의 아쉬움을 덜어주었다.
연초록의 새잎으로 피어나던 어린 나무가 나이테가 굵어져서 뿜어내는 생명의 저력을 확인시켜주는 연주회였다고 할까.
정경화가 어릴 적 살던 동네에서 본 살구나무 생각이 났다. 벚꽃이나 복숭아꽃보다 예쁜 꽃이 피는 살구나무. 옛날 중국의 동예라는 의사는 환자에게 치료비 대신 살구나무를 심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살구나무 숲이 이뤄졌는데 의술이 높을수록 살구나무숲이 넓어졌으리라.
3년 전부터 줄리아드 음대에서 후학을 지도하는 정경화는 날이 갈수록 모든 일에 감사하며, 앞으로 우리나라의 훌륭한 후배들을 돕고 싶다고 인터뷰에서 말한 일이 있다. 오래지 않아 그의 뒤뜰에도 살구나무 숲이 이뤄질 것을 기대하며 발길을 돌려 나오는데 우면산 너머에서 반짝 하고 별이 솟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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