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혜자수필가 ( 한국수필가협회 前 이사장) 열번째 작품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작가사인회는 2009년 4월 23일 오후3시
교보문고 강남점 티움공간에서 가질 예정입니다.
문의 ( 02-532-8702)
<보도자료>
유혜자 수필집 『사막의 장미』
클래식 명곡과 사랑의 언어가 교감된 독창적인 음악에세이에 주력하던 수필가 유혜자씨가 7년만에 통찰력과 인생탐구의 세련된 문체가 담긴 수필집 『사막의 장미』를 펴냈다.
「숨은 별 찾아내기」「알바트로스」「파란 창」「페이스메이커」등 73편의 수필은 삶의 궁극적 목적과 가치관에 대한 철학적 탐구이며 예리한 논리적 사고를 전개시켜 나가면서도 부드러운 화법으로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김열규(문학평론가 서강대 명예교수)씨는 이 책의 발문에서 “유혜자는 ‘보는 수필가’다. 그의 ‘암중모색’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드디어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어둔 세상, 암담한 세계에서 밝혀낸 별빛이 되어서 그 작품들은 빛나고 있다.”고 했다.
A5신/ 312면/ 정가 1만원/ 선우미디어(T. 2272-3351, 3352)
책머리에
사막에서 장미를
가는 곳이,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삶이 사막을 걷는 것처럼 고달프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행운도 만나지 못했다고 불평도 했다. 어느 순간 그것이 다음에 올 더 큰 행운에 길을 비켜주었던 것임을 느낄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바람이 부는 낮이나, 안개가 머무는 밤에도 이상과 미래, 나아가 문학적인 향취가 있는 글을 만날 수 있을까, 신앙처럼 사막의 장미를 그리워했다. 사막이 황막하다 해도 큰비에 새우가 튀어 오르듯 사랑이 있으면 녹지로도 가꿔질 수 있는 것, 그 소중함을 바늘귀만큼씩 담은 글들이다.
2002년, 수필집 자유의 금빛날개 이후 2004년과 2007년에 음악에세이를 내느라 수필집 출간이 미루어졌다. 분량이 많아서 7부로 나눴는데 1, 3, 6부는 별다르게 의미를 구분할 수 없는 수필들이고, 2부는 국내외 여행낙수, 4부는 <한국수필>에 쓴 칼럼들이다. 5부는 문단의 원로와 작고문인, 스승, 친구에 대한 글, 7부는 자연친화적인 것을 모았다.
혹시라도 사막에서 장미를 만나듯 좋은 글을 만나기를 기대하는 이들에게 실망을 드릴까 염려되어 머리를 조아리는 심정이다.
2009년 3월 3일
지석芝石 유柳혜惠자子
유혜자 수필론
보는 것, 사는 것 그리고 글 쓰는 것
김열규
(국문학자, 민속학자, 문학평론가, 서강대 명예교수)
1) 관찰, 성찰 그리고 통찰
깐깐하고 꼼꼼하다. 촘촘하고 빼곡하다. 오밀조밀하고 옹골차다. 찰지고도 끈질기다. 그러면서 자상하고도 소상하다.
이것은 유혜자의 수필과 맞대면하면서 얻어낼 가장 강한 첫인상이다. 작고 큰 사물, 좁고 넓은 세계, 심지어 그렇고 그럴 수도 있는 어느 객체를 그것들의 숨겨진 정체가 드러나기까지, 유혜자님이 아니면 못 보아낼 것이 마침내 구현되기까지, 이모저모로, 요리조리로, 묻고 또 묻고 찾고 또 찾고 캐고 따지면서 집요하게 탐색(探索)을 계속하다 보니, 깐깐할 수밖에 없고 꼼꼼할 수밖에 없다. 다부지고 질기고 하는 것은 그의 문체의 개성이자, 그의 수필의 특성이다.
그의 글을 정말이지 맞선 보는 사람과도 같은 눈길로 읽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무언가 변화가 없으면 견디지 못한다. 새로운 것, 창조적인 삶을 바라기도 한다. 일상적 삶이 답답하면 더욱 그렇다. 일상적 삶이 돌아가지 않고 거대한 늪처럼 침체해 있을 때, 여행은 새로운 공간을 찾아보려는 열망에서 비롯된다. 우리 삶의 형태는 별다름이 없으리라. 그리고 바라는 실상도 거창한 이념이나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소하지만 소중한 일상적 삶의 규범을 따름에 있다. 삶의 골격은 비슷비슷하나 피부, 즉 삶의 질을 이루는 데는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삶의 질을 가꿈에 있어서 반드시 경제적인 것에 좌우되지는 않는다. 짐작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의 발걸음, 독창적인 취미나 사고의 전환으로 가꿔가는 살결이 있을 것이다. 짐작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서 나그네가 되어 얻어지는 수중한 추억이나 은밀한 기쁨은 윤기 나는 살결을 유지하게 할 것이다.”
– 「숨은 별 찾아내기」
인용된 글의 종국적인 문제점은 여행 바로 그 하나다. 그것의 동기며 발단, 구실과 의미를 짚어내고 찍어내고 긁어내고 있다. 그러면서 묻고 또 묻고 캐고 또 캐고 있다. 집요하다. 문제 점 하나를 조명하면서 거기 몰려 들 시선은 적잖이 다양하다. 그러자니 글이 전체로는 깐깐하고 꼼꼼할 수밖에 없다. 표현이 좀 나쁜 게 용서된다면, 물고 늘어지고 또 늘어져서는 까탈 부리듯 주제를 다루고 있다. 글 그 자체의 곰바지런하기가 바로 영락없는 ‘꽁 생원’ 이다.
그런 인상을 받으면서 평자는 그의 시선을 따져 본다. 그 눈길을 가늠해 본다. 그래서 얻게 되는 생각은 그가 세상의 외관을 볼 때는 현미경이고, 세상의 속내를 들여다 볼 때는 내시경이라는 바로 그 점이다. 물론 멀리를 볼 때는 천체 망원경이다.
그의 관찰은 성찰이 되고 마침내는 통찰이 된다. 무엇인가의 외관을 눈여겨 찬찬히 살피는 관찰은 머리로 캐고 따지는 육중한 성찰이 되고 그러다가 끝내는 그 무엇인가의 눈에 보이지는 않는 내면을 발굴하는 치밀한 통찰이 된다.
그래서 유혜자는 ‘보는 수필가’다.
자신을 ‘부와이양’, 곧 ‘보는 사람’이라고 뽐내곤 하던, 프랑스의 천재 시인 랭보가 절로 연상된다. 글 쓰는 일은 생각하기에 앞서 먼저 보고 살피고 해야 하는 일이란 것을 이 수필가는 은근하게 경구(警句)나 잠언(箴言) 이르듯 시사하고 있다. 아니 그 잠언은 삶이란 것이 애당초 보는 일을 앞세우고 있다는 것까지도 함축하고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의 글은 스케치하듯이 객체를 그려 낸다. 그나마 시각이 입체적이다. 총괄적이다. 안과 밖, 위와 아래, 좌와 우, 그리고 앞과 뒤, 어느 각도 하나 놓침이 없이 객체는 묘사되고 있다. 이모저모, 여러 모로 사물들이 베껴지고 촬영된다. 그의 글 쓰는 눈길 앞에서 세상은 문득 세밀하고 암시성 짙은 정물화가 된다. 극세공품이 된다. 그래서도 그의 작품은 깐깐하고 꼼꼼하다. 끈질기다.
2) 감각의 눈이 약해서 강해진 사색의 눈
한데 이 모든 것은 그의 눈에서 비롯한다. 초등학교 다닐 무렵부터 유혜자는 눈이 좋질 못했다.
눈먼 아버지를 섬기는 청이의 삶은 나와 무관하지만 이따금 눈이 나빠서 고독과 절망에 빠졌을 때에 심봉사 부녀에 대한 연민의 정이 살아나곤 했다. 나 역시 눈이 나빠서 불행한 시절을 보냈기 때문이다. 교실 맨 앞자리에 앉아서도 칠판 글씨를 못 볼 정도의 시력이어서 미망과 혼돈의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안경을 써서 0.5정도의 시력을 갖게 된 것이 내겐 행복 이상의 충격이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하면서 0.5 정도의 시력으로도 식별하지 못할 일들이 너무 많아 불평하다가 콘택트렌즈로 보완 받아 몇 년 동안은 행복한 세월을 보냈다고 할까. 그것도 오래 가지 못했다. 눈의 쓰라림으로 콘택트렌즈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어 시력이 덜 나오는 안경을 다시 쓰게 되자 나는 어두운 구렁텅이로 내던져지는 느낌이었다.
버스 번호와 글씨를 잘 못 보고 차를 타서 엉뚱한 곳으로 가는 바람에 당황하기도 했고 외국영화의 자막이 안 보여서 배우들의 큰 동작만 보고 섬세한 연기와 미묘한 심리의 흐름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이런 것은 사치에 속하는 불평이다. 방송 프로듀서로 일할 때 스튜디오 안에서 연기하는 성우나 MC의 표정이 잘 안 보여서 연출을 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 「아련한 슬픔으로」
인용이 좀 길어진 것은 이게 바로 유혜자의 전체 생애에 걸친 자서전을 축약해 놓은 것과 추호도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스스로를 심청의 아버지에 견주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되어 있는, 이 자서전은 바로 ‘눈의 자서전’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유념하고 싶다. 눈이 그의 자서전의 줄거리를 엮어 낸 주역이고 주인공이다. 눈 따라서 그의 ‘자전(自傳)적 서사(敍事)’는 이룩되어 간 것이다. 그것은 요즘 많이 쓰는 말로 하자면 ‘눈의 내러티브(Narrative)’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한데 유혜자의 시각은 감각으로만 끝나 있지는 않다. 그에게 불행하게도 감각적인 시각의 불완전과 결격 사유가 있었기에 오히려 심리와 사색과 사유의 시력을 증폭시킨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물리적인 시력이 약한 만큼 정신적 관찰력이, ‘마음의 눈’의 시력이 오히려 더 커져 갈 수 있었다. 그러기에 유혜자의 자서전은 ‘역전극의 자서전’이고 아울러서 ‘역설 또는 반어의 자서전’이다. 그것이 수필작가로서 유혜자가 갖고 있고 누리고 있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자 개성이다.
이 점은 작가 자신이 잘 알고 있고 자각하고 있다.
나의 핸디캡으로 인한 불편, 고통을 잘 견디어내서 슬기롭게 극복하는 일만이 과제였다.
나는 어렴풋이 시계의 사물들을 감지했기 때문에 나머지는 맘껏 상상으로 봉헌했다. 그리고 행운의 망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곧 현실성이 없는 공상의 세상임을 깨닫곤 했지만 공상에 빠졌을 때만은 행복하기도 했다. 이것은 유년 시대에만 누릴 수 있는 철없는 일이었다. 허황한 상상 대신 풍부한 직감과 상상력으로 남의 웃음 뒤에 숨겨진 내적 표현을 읽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성과 직관, 그리고 성실한 사색으로 알찬 필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었을 텐데.
– 「아련한 슬픔으로」
그가 바라고 실천했던 것은 결코 유년시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 유년시절의 재질과 기능은 성인이 되고 방송국 PD가 되고 수필작가가 된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가 ‘직감, 직관, 이성 그리고 사색에다 상상력’까지, 두루 갖춘 시각의 수필가라는 것을 그의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이 모든 감성과 지능이 그에게는 또 다른 눈이었던 것이다.
3) 별 찾기
벌써 20년은 더 지난 무렵의 일이다. 수필 쓰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유혜자를 처음 만났을 때, 다름 아닌 그의 눈길에서 또는 눈짓에서 강한 첫 인상을 받았었다.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에도 그의 눈길은 바로 ‘응시’ 그것이었다. 그 눈살은 초점을 진하게 갖추고는 일직선으로 화살처럼 날아드는 것 같이 느껴졌다.
물론 그 때는 그 특이한 눈길에 무슨 사연이 깃들여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얼마 뒤, 그의 글을 읽게 되면서 비로소 내면의 곡절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서야 가까스로 ‘응시’ 바로 그것이 그의 시각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응시가 투시(透視)로 통하고 사색으로 통한다는 것도 아울러서 보아내게 된 것이다. 그의 눈은 단적으로 사념(思念)이고 또한 사유(思惟)다. 그가 보는 일은 ‘알아보는 일’이다. 보는 것과 앎은 맞통해 있다. 그리고는 마침내 삶을 사는 것과도 맞먹고 있다.
봄바람이 머무른 곳에 새 싹이 움트고 자라듯 예술가의 열정이 응집된 시선은 아름다운 예술의 꽃을 피워 유구한 영혼의 세계를 넘나들게 할 것이다. (…중략…) 본다는 것, 전망해 본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실재하는 것, 생성하고 성장하며 어떻게 스러지는지, 존재와 상황을 파악하는 시선 속에는 희망과 동경이 기원도 들어 있으리라.
– 「시선이 머무는 곳」
이건 남의 얘기가 아니다. 유혜자 자기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기도 하다. 그의 인생관에 곁들인 예술관과 세계관 그리고 수필 창작론이 이 짧은 말 속에 응축되어 있다. 수정구슬처럼 결정(結晶)이 되어 있다.
그가 가령, 어느 조각 작품이나 동상을 볼 때, 그 전체 조형성보다는 그 눈길에 초점이 모아진다. 그 작품의 눈이 그가 관심을 두는 바로 ‘조형성’일지도 모른다.
서울 세종로에 높이 세워져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의 시선이 아래를 향하고 있다. 동상을 제작한 K씨의 유족들이, 높이 세워지게 되어 있던 동상이어서 지나가는 시민들을 향한 시선으로 만든 것이라고 밝혔다.
– 「시선이 머무는 곳」
한데 이와 같은 유혜자의 시선은 또 다른 동상에서 더 한층 빛나고 있다.
화강암의 높은 좌대 위 의좌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 있는 청동 동상의 슈만은 왼 손으로 턱을 괴고 있다. (…중략…) 그리고 아래쪽을 향한 듯한 그의 시선은 어디로 향한 것인지. 시선이 닿은 곳이나 사람도 그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좌상을 올려다봐도 시선이 어디를 향했는지 짐작이 안 되었다. 고뇌 끝에 체념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고 막연하게 먼 지평선으로 허망하게 보내는 시선도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 「시선이 머무는 곳」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패러디를 만들자면, 유혜자가 음미하고 감상하는 조각은 단적으로 ‘보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에게서 보는 일은 단적으로 사색이고 탐색이다. 눈이 대뇌와 함께 사고하고 생각한다.
이 같은 그의 남다른 눈은 ‘별 찾기’로 집약된다.
안과에서 일 년에 한 번씩 시야 검사를 한다. 시야검사는 눈을 움직이지 않고 볼 수 있는 범위를 검사하는 것으로, 최근에 컴퓨터 프로그램화된 자동시야 검사로 편리하게 검사할 수 있다. 거기 앞면에 이마와 턱을 바싹 붙인 후 작은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면 은하계같이 뿌연 화면의 가장자리 쪽에서부터 반짝 별이 나타난다. 이 별이 돋는 순간 재빨리 손에 쥔 신호기의 버튼을 누른다. 눈의 초점을 모으고 바깥, 안쪽에서 나타나는 별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에선 뜨거운 눈물이 흘러 내려도 닦을 새 없이 버튼을 눌러야 한다. 별을 식별해냈어도 버튼을 안 누르면 검사표에 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 「숨은 별 찾아내기」
여행 떠나고 싶은 충동과 작가 스스로 연관 짓고 있는 이 별 찾기의 상징성은 유혜자에게는 매우 요긴하고 또 크다. 그에게서 여행은 이 글의 서두에서 인용된 글이 이미 보여주고 있듯이, 신세계에 대해서 자기 개발을 하면서 미지를 찾아내는 탐색이다. 그에게서 여행과 지적인 탐색은 추호도 다름없다. 그것은 그가 살아가는 과정에 그냥 그대로 반영되고 그 결과가 한편의 수필로 나타나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은 어둠 속에서 별빛을 찾아내는 바로 그 시력검사의 연장선상에 자리하고 있다. 그는 평소에도 세상을 두고, 인생을 두고 또는 사물을 두고 시력검사를 하고 있다.
눈이 밝은 나머지 우리들은 몇 개의 특별난 것이나 몇 가지의 관심거리가 아니고는 무심코 보아 넘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대충 보고 대충 대충 살아가는 비중이 커지기 마련이다. 우리들은 세상을 스쳐보기 마련이다. 한데 유혜자의 일상적인 시력검사는 우리들의 눈이 스쳐서 지나간 것에 제동을 건다. 그리고는 의미를 캐고 뜻을 짚어 낸다. 시력이 약한 것에서 반사적으로 큰 이득을 그는 챙기고 있다. 무엇이나 그냥 보아 넘기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베토벤은 그의 9번 교향곡의 초연을 직접 지휘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청중은 우뢰와 같이 환호했다. 교향악단 단원의 한 사람이 베토벤에게 돌아보라고 손짓했다. 돌아선 악성(樂聖)은 그때서야 그 환호며 손뼉 치기를 알게 되는데, 이미 귀머거리가 된 그는 듣고 안 게 아니다. 눈으로 보고서야 겨우 알게 된 것이다. ‘듣는 기능을 상실한 위대한 음악가’라는 역설에 비겨서 우리는 시력이 약한 나머지, 보는 게 마땅찮아서 비로소 남보다 더하게 사물과 세계의 속이며 안을 보게 된 수필가를 평가해도 좋을 것이다.
수필가 유혜자는 시력이 약하기에 예사 남들에게는 안 보이는 것을 비로소 찾아내고 탐색해 낸 것이기에 그에게서는 수필 쓰기는 ‘퀘스트’, 곧 뭣인가 모르는 것을 새로이 발견하는 작업이 된 것이다. 그럴 때, 시각은 촉각과 청각 그리고 후각을 더불어서 찾기에 나서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감각들은 사색이 되고 사념이 되어서 별 찾기의 대단원을 불러 온다.
해서 수필가, 유혜자에게서는 ‘암중모색’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드디어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어둔 세상, 암담한 세계에서 밝혀낸 별빛이 되어서 그 작품들은 빛나고 있다. 우리들의 어둠에 가린 의식, 암담한 지각을 밝힐 별빛으로 그의 작품은 반짝이고 있다. 우리들은 누구나 그의 글을 읽으면서 별빛 찾기의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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