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치고 수필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만 수필에 대한 애정을 말하며 한국의 '수필문학'을 말할라치면 가장 쉽게 떠오르는 이름 중 하나가 수필가
매원(梅園) 박연구(朴演求) 선생이 아닐까싶다. 그도 그럴 것이 대개의 사람이 직업을 갖고 수필을 쓰기에 앞에 직업 또는 직함을 표시하고 뒤에 수필가라는 것을 덧붙이는 것으로 소개하는데 비해 박연구 선생은 '수필쓰기'가 직업일 만큼 전 생애를 수필에만 매달려 온 사람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오직 '수필가 박연구'로만 지칭된다. 하기야 직업이라면 돈벌이가 되어야 하는데 박연구 선생에게 있어서 수필이 얼마큼이나 생활을 위해 도움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그에게 얼마큼의 수입이 생기고 아니 생기고를 떠나서 '수필가'가 직업이라고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음은 그만큼 그의 삶 전부가 수필과 함께 하는 삶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는 매원 박연구 선생을 '수필문학의 자존심을 지고 직업 없이 살아온 유일한 직업 수필가'라고 말하고 싶다.
또 하나, '수필!' 하면 수필 작가와 작품이 떠오르기 마련인데 '수필' 하면 '박연구'가 떠오르고, '박연구' 하면 <외가만들기>, <말을 알아듣는 나무>, <바보네 가게>가 금방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가 근원 김용준과 외우 김동석의 수필을 소개함으로 수필문학 인구를 크게 확장시킨 것이나 현대수필동인회 주간, 월간 수필문학 주간, 게간 한국수필 편집인, 범우에세이문고 편집인, 계간 수필공원 편집위원, 주간, 편집인, 발행인 그리고 계간 에세이문학 발행인 겸 주간에 이르기까지 우리 나라 정통 수필문학지가 대부분 매원의 손을 거쳐 시작되고 성장했던 것만큼 그의 수필에 대한 열정과 공로는 아무도 따를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필에 대한 그의 사랑은 단순한 사랑의 차원을 넘어 거룩하다고 해야 할만큼 수필에 대한 존엄성 내지 경외심까지 지키고자 한다. 필자가 몇 년전 국회사무처에서 월간으로 발간하는 대한민국 국회보에 1년 넘게 수필 필자를 선정 청탁을 했었는데 그 때 매원 선생께 청탁을 드렸더니 극구 사양을 하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육십이 넘은 수필가에겐 가급적 수필 청탁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작품의 신선도도 떨어질 뿐 아니라 아무리 수필이 중년 이후의 문학이라지만 나이가 들면 작품을 제대로 생산해 낼 수 없는 것이니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에게 청탁을 하라는 것이었다. 고료도 나가고 또 쉽게 작품을 실을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그러나 수필로 평생을 살아온 분이 수필 한 편 못 쓸 것인가 마는 수필을 아끼는 그의 마음은 그렇게 까지 깊은 것이었다. 지금까지 써온 수필작품에 비해 더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하고 오히려 지금까지보다 마이너스의 글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우려는 비단 자신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수필문단 그리고 미래의 독자까지도 생각하는 깊은 애정의 마음씀이었던 것이다. 겨우 작품을 받긴 했지만 그 때 필자도 매원 선생의 말씀을 듣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었다. 그는 그만큼 정신에서도 행동에서도 수필의 장인(匠人)이었다. 한 가마를 열고도 마음에 드는 작품 한 점 얻지 못한 채 모두 깨트려 버리는 도공(陶工)처럼 매원 선생이 수필 한 편을 빚어내는 모습 또한 심혈을 기울여 도자기를 빚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 들여 가마에 넣어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 불을 지피며 혼신을 다하는 도공의 거룩한 아름다움의 모습이었다.
그의 수필 인생으로 볼 때 비교적 최근작이라 할 수 있는 수필 <환경운동과 수필쓰기>를 보면 그의 수필관, 그의 수필에 대한 애정을 잘 들여다 볼 수 있다.
'내가 설 영토를 다지기 위해 수필 동인지. 수필 전문지 등을 편집하는 한 편, 신문사의 신춘문예나 문학지의 추천 제도에 수필부문도 설치해 줄 것을 건의하는 등 백방으로 뛰면서 30여년 세월을 보냈다. 현재도 수필 잡지 하나를 편집하면서 자존심을 걸고 꾸려가고 있는데, 어쨌든 남은 생애도 수필쓰기와 수필 잡지 내는 일에 바칠 생각이다.'
뿐아니라
'중요한 이유는 그간에 수필가의 수필이 구매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로는 수필 잡지의 신인 양산의 결과로 작품의 질적 저하를 들 수 있겠고, 또 하나는 수필이 담고있는 메시지가 역사성을 탄력적으로 수용하지 못했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매원은 수필을 '마음의 나체(裸體)'를 진솔하게 표현하여 독자에게 친근감을 갖게 한다는 것이 수필의 장점이며 매력이라고 하고,
연문(戀文)을 쓰는 심정으로 수필을 쓴다고 했다. 독자라는 연인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아름다운 문장 속에 '마음의 나체' 즉 진실을 담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원 선생은 어쩌면 지금도 고교때 친구의 누이동생이었던 첫사랑 k에게 띄워보낸 그 수많은 편지를 쓰는 연모의 마음으로 수필 곧 연서(戀書)를 쓰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수필마다에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무언가가 있다.
매원의 수필은 '비임'속의 맑음이다. 빈 항아리에 바람 지나가는 소리 같이 그는 '비임'의 공간에 턱없이 모자라는 작은 것을 담고자 한다. 그런데 그것이 매원만의 맛이요, 멋이요, 색깔이 된다.
매원과 동향인 평론가 김종완은 '가난'이란 말로 함축하고 있지만 그 가난은 궁상 곧 옹색함을 연상시키는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약성서 '산상수훈'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설교의 시작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와 같은 그런 깨끗함의 가난이 연상되기에 필자는 '비임 속의 맑음'이란 표현을 써 보았다.
그의 작품 소재는 지극히 가까이 있는 것들이다. 작은 것을 소유하는 것조차 힘겨워 했던 그의 눈, 그의 가슴은 저 멀리까지 눈을 돌리게 하거나 가슴을 열 엄두를 못 내게 한다. 아니 매원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가까이 있는 것들, 작지만 당신의 것이 되고, 될 수 있는 것들이 더욱 소중한 것이다. 그렇다고 울타리를 쳐놓고 내 것에 대한 편협이나 독선의 아성을 쌓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저 있는 것에 만족하고 욕심 부리지 않으며, 없는 것에까지 원망할 줄 모르는 답답할 만큼 무욕한 선비다.
그렇기에 그에게 소유되는 것은 아주 하찮은 것, 평범한 것들조차 이내 무엇보다 소중한 것, 아주 귀한 것이 되어버린다. 많이 가질 수 없는 만큼 그가 갖게되는 것은 쉽게 넉넉히 가질 수 있는 이들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소중함으로 그의 삶 속에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해 버린다.
매원 박연구 선생을 생각하면 내가 감히 '수필가'란 이름을 달고 산다는 것이 부끄럽고 황송하기 그지없어진다. 이 땅에 '수필가'란 이름을 당당하게 달고 다닐 수 있게 한 눈물의 수필 전도사가 바로 박연구 선생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혹자는 자기 자신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시인도 아니고, 소설가도 아닌 그가 수필가로써 아니 수필가가 인정받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겪어야 했던 아픔, 슬픔, 고통, 수모, 절망을 감히 누가 당할 수 있었던가. 그는 분명 자의이건 타의이건 간에 이 땅에 '수필가'라는 이름을 걸어놓을 수 있도록 큰못을 박아 걸 자리를 만든 이요, 명패를 만들어 자리를 확보해 낸, 이를테면 수필가의 길을 연 고난의 십자가를 진 사람이다.
매원의 인생에서 수필은 결코 선택일 수 없는 필수였다. 그렇기에 그 수필이 설 자리를 어떻게든 마련해야 했다. 해서 매원의 '수필쓰기 인생을 회고한다'를 읽다보면 나처럼 거저먹기(?)로 수필가가 된 경우는 그야말로 죄송스럽다.
선생은 1970년 '우리 문단에 수필가도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뜻을 같이하는 몇 분들과 만든 '현대수필동인회'의 주간이 되어 <현대수필>을 5집까지 내면서 우리 나라 수필문학 개화의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계속해서 월간 <수필문학>, 계간 <한국수필>, 계간 <수필공원> 등의 주간 및 편집인이 되어 수필잡지를 발간하면서 수필이 문학의 분명한 한 장르로 자리 매김 할 수 있도록 외로운 투쟁(?)으로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다.
특히 우리 나라 최초의 수필문고인 《범우 에세이 문고》전 120권을 기획 편집하여 완간한 것과《한국수필문학대전집》전 20권의 책임 편집을 맡아 발간한 것은 수필문학의 위상 제고와 수필문학 인구의 저변확대는 말할 것 없고, 우리 수필문학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다..
이번에 펴낸 수필선집《초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매원 만큼 '수필'에 장인 정신을 가진 이가 더 있을까 싶어진다.
이 땅, 이 시대엔 수필 그리고 수필가가 넘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참으로 '수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수필가'란 이름을 달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네 딸아이가 낳은 아이들을 우리 집에 다 모이게 하면, 밤톨 같은 외손주 녀석들이 됫박으로 비유될 수 있는 우리 집에 가득 채워져서, 우리 내외의 입이 함박만하게 벌어질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가을과 밤톨이 주는 이미지> 중
매원은 밤톨 같은 외손주들이 집에 가득 차듯 '보석같이 아름다운 수필작품'을 써내는 '수필가'들이 문단에 가득 채워지길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매원이 추구하는 행복은 지극히 소박하다. 허나 그만큼 진실하다. 매원은 결코 내것이 될 수 없는 바깥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 곧 행복이란 밖으로부터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 품안, 내 영역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것에서 찾을 줄 아는 눈길이요, 그것을 행복으로 느낄 줄 아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자기 것에 대한 지나친 애착으로도 보이지만 매원에게 있어서 그것은 당신이 추구하고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자신있는 일이며,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용량인 것이다.
못 하나도 제대로 박지 못하는 매원에게 있어서 '수필'은 그야말로 구원이요, 숨구멍이었던 것이다. 그 숨구멍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감사히 숨을 들이쉬었고, 그것들은 그의 삶이 만들어낸 작은 울타리-그러나 매원에겐 거대한 우주적 공간이었다- 안에서 '수필'이란 이름으로 짜여지고, 때로는 그림이 되기도 하고, 음악이 되기도 하며 사람들에게 빛으로 소리로 색깔로 보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매원의 그런 진실은 수필문학의 자존심으로 자신의 삶을 수필의 삶이 되게 했으며, 이 땅에 '수필' 그리고 '수필가'란 이름이 이만큼 자연스럽게 불리고 인정받게 된 것이 아닌가싶다.
매원 박연구 선생의 수필선집 《초상화》를 통해 그의 수필 인생을 살펴보며 새삼 내가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 수필가의 한 사람이 되어 있다는 사실에 가슴 뿌듯함을 느낀다. 이젠 현대 수필의 고전이 되어있는 그의 수필만큼 '비임 속의 맑음'의 삶이 행복의 실체도 가슴에 품는 더욱 아름다운 수필의 삶으로 되길 바램한다.
■ 최원현
수필가.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수필집『서서 흐르는 강』(선우미디어 刊)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