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는 수필들/수필의 향기

[스크랩] "하숙집" / 최원현(수필가)

늘샘 2014. 12. 10.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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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 없는 인생길에 만나 교차하던

 

 

"하숙집"

 

글 최원현(수필가) 그림 이예숙

 

 

최희준의 노래 ‘하숙생’을 문우가 문자 메시지로 보내왔다. 오랜만에 들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이만큼 나이가 들어서인지 가사가 유난히 가슴을 파고든다.

구름이 흘러가듯 강물이 흘러가듯 우리 또한 이 세상에서 하숙을 하다가 먼저 가신 이들처럼 소리 없이 가야 하는 게 인생일 것이다. 나도 몰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는데 지나간 날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간다.

헌데 그 속에서 손을 흔들고 스쳐가는 한 모습이 있다.

 

 

" 그의 고향은 전남 순창이었다.

고등학교를 마치자 그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하숙을 했다. 학교 옆이었다. 아니다.

처음엔 분명히 자취를 한다고 했고 자취집을 구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하숙집을 정했다고 했다.

조금 엉뚱한 구석도 있지만 그의 집 생활은 비교적 넉넉했기에 하숙비 걱정은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고등학교 3년의 전력을 내세우며 부득부득 자취를 하겠다고 했는데 왜 갑자기 하숙으로 바꾼 걸까.

하숙집은 자취집을 정했던 바로 옆집이라고 했다."

 

 

자취집에서 반찬거리를 사러 나가는데 한 아가씨가 바로 옆집으로 들어가더란다. 순간 내 성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가 들어간 집을 바라보니 ‘하숙생 구함’이란 글이 붙어있더란다. 그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뒤쫓아 들어가 하숙을 하겠다고 했더니 여학생만 받는다고 하더란다.

허나 그가 어찌나 집요하게 간청하고 설득하여 물고 늘어졌는지 결국 허락을 받아냈고 그날부터 바로 하숙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순전히 한 번 본 그 아가씨에 빠져 그 집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나도 녀석의 하숙집엘 몇 번 갔었는데 괄괄한 성격의 그가 어찌나 그 집에선 고분고분한지 이상해 보일 정도였다. 바로 그 집 딸인 S여대생 때문이었다. 나도 그 여학생과 몇 번 마주쳤지만 말을 건네거나 해보진 못했었다. 하지만 녀석은 넉살 좋게 하숙집 주인에게 “어머니, 어머니”하면서 싹싹하게 해댔고, 늘 늦게 들어오는 주인아저씨 대신 남자 손이 필요할 일들을 곧잘 해주어 식구처럼 지내는 것 같았다.

 

그 집엔 꽤 큰 석류나무가 있었는데 그 시고 달콤하던 맛은 지금까지 잊어지지 않는다. 마당가엔 펌프도 있어서 여름이면 녀석은 그곳에서 등목도 한다고 했다. 하숙집이란 내 가족이 아니면서도 내 가족처럼 마음과 공간을 공유하는 곳이다. 특별한 음식을 마련할 때도 있지만 대개 일상의 먹는 반찬에 손님용 반찬 한 가지 정도 더 마련하고 식구들 식탁에 숟가락 하나 더 올리는 것이 일반적 행태였다. 물론 대대적으로 하는 그런 직업적 하숙과는 다른 경우다.

 

 

"한 집에서 매일 같이 밥을 먹는 사이이니 가족이 아닌가.

그것이 1년, 2년, 3년으로 이어지면 가족보다 더 정이 들 수도 있다. 나는 직접 하숙할 기회는 가져보지 못했지만 친구의 하숙집을 통해 그 맛을 조금은 맛보면서 한껏 부러운 마음을 갖기도 했었다.

녀석은 그 집 딸과 상당히 관계가 진척되어 결혼을 하게 되지 않을까도 상상을 했었지만 인연은 거기까지만 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볼 때 군 입대로 막이 내린 녀석의 하숙생활 3년여는 아주 행복한 시절이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내가 결혼해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인데 시골에 내려가니 장모님께서 하숙을 치신다 했다.

웬 하숙이냐 했더니 마을 건너에 중학교가 생겼는데 학교 선생님 중 몇이 찾아와 부탁을 했다 한다. 환갑나이에 어떻게 손님식사를 매끼 해 줄 수 있겠느냐고 거절을 했지만 드시는 식사와 반찬대로 해달라고 간청을 하니 거절을 더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처음에 선생님 둘을 받게 되었고 하나 더 늘어 셋의 식사를 해 주게 되었단다. 점심까지도 먹어야 하는데 집까지 먹으러 오는 게 번거롭고 불편할 테니 학교로 가져다주겠다고 했더니 학교에서 일하는 아이를 보내 가지러 오고 그릇은 퇴근 때 가져오곤 한단다.

 

그래도 부부만의 식사로 가벼울 수 있던 식탁인데 매끼 반찬 걱정을 해야 했고 늘 같은 반찬만 상에 올릴 수도 없으니 꽤 신경이 씌었을 법하다. 한데 매월 꼬박꼬박 정해진 날에 들어오는 하숙비에, 두 노인만 사는 집에 젊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것이 좋기도 했었나 보다.

장모님께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몇 년간이 참 즐거웠다고 하셨다. 거기다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간 후에도 가족과 함께 찾아오거나 명절 때 인사를 오곤 했다 한다. 장모님이 참 잘 해주셨던 것 같고 그들은 그들대로 가족
과 떨어져 살면서 많이 외로웠을 텐데 장모님 덕에 가족의 정을 느끼며 살았던가 보다.

그렇고 보면 하숙집이란 피가 섞이지 않은 가족의 구성체요, 세상에서 가장 끈끈한 조직이 가정이라면 하숙집
도 그만 할 것 같다.

 

 

"친구의 하숙집에서 보고 느끼던 따뜻함과 스스럼없음, 어쩌다 처가에 갔을 때 한 상에 둘러 식사하던 하숙생 선생님들을 생각하면 요즘 가족끼리도 한 달에 한 번 함께 식사하기도 어려운 현실이 안타깝고 가슴 아프다. 그러니 아무리 피붙이라도 정이 자랄 수 있겠는가. 그저 가족이라는 의무감으로 겨우 지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상에 밥을 먹어야 정이 나고, 한 방에 잠을 자야 흉허물이 이해된다고 했던 옛 어른들 말씀이 결코 그르지 않으리라."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하숙집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아주 큰 인기를 끌었는데 하숙집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일 수 있지만 가장 사람 사는 맛을 느끼게 하는 우리만의 공유 공간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인지 최희준의 ‘하숙생’ 노래 가사가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인생 자체가 잠시 머물고 가는 하숙집이고 우리 모두가 하숙생이다. 내 품안에 있던 자식도 어느 순간 제 날개가 생겼다고 그 날개힘 만큼씩 날아가 버린다. 손주 녀석들은 아직 날개가 없으니 저러지 곧 할애비 찾아오는 것도 핑계 앞세워 미루고 미루리라.

 

문우가 보내준 노래를 틀어놓고 듣노라니 내 집이라고 살고 있는 이 집도 하숙집이고 북적대는 아들네 식구도 얼마 후면 저들 길로 떠날 하숙생이 빤하니,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이란 노래 가사가 꼭 맞는 것 같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 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별거숭이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가

강물이 흘러가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출처 :

문화재청. 월간문화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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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생' 하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난다. 

 

중학생 때다.

당시에 시골에서 유학온 하숙생들이 제법 많았다.

대개 한 방에 둘씩 하숙을 하는데 저녁에는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밥상은 무조건 두사람 밥이 들어왔다.

한 녀석이 늦게 들어 와도 밥 한사발을 남기고 보자기로 덮어 놓으면 늦게와서 먹고는 했다.

전기도 밤 늦게 안 들어 오기도해서 촛불은 항상 필수품이다.(하숙집마다 다름)

마침 한녀석이 안들어와서 장난기가 발동했다.

밥상을 벽에 붙이고 촛불을 켜 놓고 밥위에 수저를 꽂고 종이에 지방을 써서 벽에 붙여놨다

 

"顯考中學生○○○府君神位"(현고중학생○○○부군신위)

 

후에 난리가 났다. 삐쳐서 몇달 동안 말도 안하고 지냈는데 싹싹 빌었었다^^

중학생이 무슨 한자를 아느냐고?

흐흐.....  당시 같은 반에 사서(四書) 띠고 한시(漢詩)도 지을 줄 아는 '훈장'(별명)이 하나 있었고 얼치기(대강 배운놈)가 둘 반 있었다.

또 당시는 국민학교(지금 초등학교)에서 한자를 배웠었다. 고교 때 장가간 놈도 있었는데 뭘^^

전문으로 하숙만 하는 집은 당시에는 불평이 더 많았다. 후에는 좋은 추억이 되지만. 

 

재미있는 일이 또 있었는데 이 '훈장'놈 내력이 무진 재미있다.

종가집 장손인데 어느날 자기 집엘 가잔다. 아마 일요일 이였을거다.

셋이 시골집엘 갔는데 고래등 같은 기와집으로 들어가니 잔치날인지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었다.

집에 들어가며 이 놈이 태도가 싹 바뀌는데 당당하게 뒷짐을 지고 뻐기고 가니 이게 웬일인가? 일하던 어른들이 전부 90도 숙여 인사를 하는게 아닌가.

"아이구 도련님 오셨어요" 

어느 아주머니가 뒤를 따라오니 이 놈하는 소리가 기가 찬다.

"친구하고 왔으니 상 좀 봐오게" 

반말이다.

얼마후 어른 둘이 큰 잔치상을 들고 오는데 술잔에 술주전자까지 있다. 훈장놈은 술먹는데 이력이 났는지 술도 잘먹고 모습은 중학생인데 하는 짓은 영락없는 영감짓이였다. 그날 술먹고 죽는 줄 알았다.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 훈장친구는 후에 명문고, 일류대 갔다.

 

예전에는 시골에서 도시로 학교를 보내려면 논밭 다 팔아치워야  가능했다. 그리고 시골에서는 내노라하게 공부 좀해야 좋은 중,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다. 중학교도 시험봐서 들어 갔으니까.

 

이제 호랭이 담배피던 옛날 얘기다.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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