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도 詩로 극복한 '문단의 대모'
최종수정 2015.10.13 13:37 기사입력 2015.10.13 13:37
생애 마지막까지 '시인의 말'을 남기고자 했던 원로시인 홍윤숙 별세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세상은 / 썰수록 커 가는 / 부재의 둥근 사과 / 이가 시린 사과 속에 / 손을 담그면 / 멎었던 일상의 시계 소리도 / 여울져 오고'.
잊고 지내기 쉬운 존재에 대한 향수. 시인 홍윤숙은 인생론적 모럴에 안주하지 않았다. 깊은 관심과 배려로 마중을 나가 부재의식을 이기고 나아가 자아를 발견했다. 그 고귀한 관념의 트레이닝을 더는 엿볼 수 없다. 12일 오전 10시30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0세.
1925년 8월 19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과를 다닌 고인은 1948년 '예술평론'과 '신천지'를 통해 등단했다. 1962년 '여사(麗史)시집'을 시작으로 '타관의 햇살(1974년)', '낙법 놀이(1994년)', '쓸쓸함을 위하여(2010년)', '그 소식(2012년)' 등을 출간하며 무려 반세기를 현역으로 활동했다. '자유, 그리고 순간의 지상(1972)', '해질녘 한시간(1980)', '세상의 모든 것들은 고독을 노래한다(1996)', '예술가의 이야기가 있는 방(2004)' 등 수필집도 아홉 권을 냈다.
희곡, 평론까지 아우른 그의 작품세계는 순수세계를 정서적으로 탐구하다가 점점 모순과 어둠으로 가득 찬 현실적인 삶의 세계를 탐구하는 데로 확대됐다. 고인은 이 과정을 통해 애상과 자학 혹은 비애와 탄식의 태도를 보였다. 후기에는 체념과 정관 혹은 초월과 관조의 자세를 드러내기도 했다. 등단 전 태양신문사 문화부 기자 등으로 활동해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한국여류문학인회 회장, 한국가톨릭 문우회 회장, 한국시인협회 회장 등을 맡으며 시단에서 존재감을 넓혔고, 1990년에는 예술 발전에 현저한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인준됐다.
고인은 노년이 돼서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2006년부터 3년여 동안 세 번의 수술과 크고 작은 질환으로 투병생활을 했지만 2012년 시집 '그 소식'으로 제4회 구상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2009년 '시인세계' 겨울호에서 "공황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일이 돌보지 못하고 버려져 있는 글 조각들이었다. 그것들을 어떻게든 정리해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마음을 다지고 일어나 앉았다"고 했다. 생애 마지막 시집이 된 '그 소식'의 '시인의 말'에서는 "내 생애의 마지막 시집에 할 말은/ 다가올 죽음 앞에 당당하고 의연하게/ 마주 설 것이다/ 그것뿐이다"라며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


http://blog.naver.com/ilamjcyong/100132072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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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땅
그 집에선 늘
육모초 달이는 냄새가 났다
삽작문 밖 가시 울타리는
내 키를 넘고
바다는 어디만큼 열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뒷산 밤나무숲은 사철을 울창하여 침울했고
바람이 미로에 빠진 듯 헤매다녔다
그 시절 내 가슴은 남모르는 미열에 떠 있었고
아듯히 먼 령 너머 초록의 녹지가
꿈속까지 따라와 나를 불렀지만
그리로 가는 길을 알지는 못하였다
가슴 한켠이 늘 유리에 벤 것처럼 쓰라렸다
미지의 땅은 그처럼 넘치고 푸르른 것인가
나의 뒤에 오는 그 누가 또 오늘은 그날의 나처럼
저 영 너머 초록의 녹지를 꿈꾸고 있을까
갈 수 없는 나라를 꿈꾸며 앓고 있을까
이쯤 서서 보니
만물이 공허 속에 하얗게 드러나
세계가 무한한 허무임을 알겠는것을.
골목 안 풍경(風景)
그 골목엔
사철 유리문 덜컹거리는
야채가게와
신기료 할아버지의
노점(露店)이 있었다
테레지아 성당에선
주일(主日)마다 울리는 맑은 미사소리
목소리 우악하신 장신(長身)의 신부님이
이따금 거목(巨木)처럼 골목 밖을
내다보셨다.
세상은 완벽한 신(神)의 풍차(風車)
아침이면 삐걱대는 생활의 문소리
골목을 열고
한낮이면 셀로판지에 싼
한 포기 꽃으로 잠드는 골목
그 골목에
20년 뿌리내린
나도 변함없이 생활을 쪼아온
빛의 석수(石手)다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을 맞으며 오라
눈 속에 눈처럼 하얗게 얼어서 오라
얼어서 오는 너를 먼 길에 맞으면
어쩔까 나는 향기로이 타오르는 눈 속의 청솔가지
스무살 적 미열로 물드는 귀를
한자쯤 눈 쌓이고
아름드리 해뜨는 진솔길로 오라
눈 위에 눈 같이 쌓인 해를 밟고 오라
해 속에 박힌 까만 꽃씨 처럼
오는 너를 맞으면
어쩔까 나는 아질아질 붉어오는 눈밭의 진달래
석달 열흘 숨겨온 말도 울컥 터지고
오다가다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눈길 위에 자라온 꿈
삼십년 그 거리에
바람은 청청히 젊기만 하고
눈발은 따뜻이 쌓이기만 하고...
12월 1일
한 시대 지나간 계절은
모두 안개와 바람
한 발의 총성처럼 사라져간
생애의 다리 건너
지금은 일년 중 가장 어두운 저녁
추억과 북풍으로 빗장 찌르고
안으로 못을 박는 결별의 시간
이따금 하늘엔
성자의 유언 같은 눈발 날리고
늦은 날 눈발 속을
걸어와 후득후득 문 두드리는
두드리며사시나무 가지 끝에 바람 윙윙 우는
서럽도록 아름다운
영혼 돌아오는 소리
장식론
여자가
장식을 하나씩
달아가는 것은
젊음을 하나씩
잃어가는 때문이다
<씻어 무우> 같다든가
<뛰는 생선> 같다든가
(진부한 말이지만)
그렇게 젊은 날은
젊음 하나만도
빛나는 장식이 아니겠는가
때로 거리를 걷다보면
쇼윈도우 비치는
내 초라한 모습에
사뭇 놀란다
어디에
그 빛나는 장식들을
잃고 왔는까
이 피에로 같은 생활의 의상들은
무엇일까
안개같은 피곤으로
문을 연다
피하듯 숨어보는
거리의 꽃집
젊음은 거기에도
만발하여 있고
꽃은 그대로가
눈부신 장식이었다
꽃을 더듬는
내 흰손이 물기 없이 마른
한장의 낙엽처럼 슬쓸해져
돌아와
몰래
진보라 고운
자수정 반지 하나 끼워
달래어 본다
급행열차로1
급행열차로 서둘러 달려온
서쪽 베타니아 마을에선
때마침 짧은 겨울해가 지고 있었다
낯선 술집과 어둠이 줄지어 선 땅엔
올리브나무도 작은 나귀도 보이지 않고
무수히 지나온 간이역
내릴 수 없었던 미지의 땅에
점점이 피어 있던 해바라기 달리아
그 원색의 빛깔들만 등뒤에 선연했다
급행열차로 서둘러 달려와도
그 마을의 일몰엔 변함이 없었다
다만 천천히 걸어온 이보다
쓸쓸한 일몰의 시간이 좀 길 뿐이었다
급행열차로2
멀리서 바라보는 불빛은
이상하게 아름다웠다
이따금 몇 개의 별들이
남몰래 그곳에서 밀송되어오고
가보지 못한 어린날의 보물섬도
그 속에 있을 것 같아
깜박 사는(生) 일도 잊어버리지만
언제나 밀봉된 마지막 밀서는
내 것이 아니었다
지도에도 없는 길을
등 떠밀리며 떠밀리며 흘러가는 밤
한 꺼풀 얇은 미농지에 싸인
세상의 저편에선 밤새 비 내리고
사십 년 떠돈 마음의 방주도
잠길 듯 잠길 듯 가라앉는다
나는 몰라
한 겨울 얼어붙은 눈밭에 서서
내가 왜 한 그루 포플러로 변신하는지
내 나이 스무 살 적 여린 가지에
분노처럼 돋아나던 푸른 잎사귀
바람에 귀앓던 수만 개 잎사귀로 피어나는지
흥건히 아랫도리 눈밭에 빠뜨린 채
침몰하는 도시의 겨울 일각(一角)
가슴 목 등어리 난타하고
난타하고 등 돌리고 철수하는 바람
바람의 완강한 목덜미 보며
내가 왜 끝내 한 그루 포플러로
떨고 섰는지
모든 집들의 창은 닫히고
닫힌 창 안으로 숨들 죽이고
눈물도 마른 잠에 혼불 끄는데
나는 왜 끝내 겨울 눈밭에
허벅지를 빠뜨리고 돌아가지 못하는
한 그루 포플러로 떨고 섰는지
길 끝의 집
날이 새면 우리들은 다시 떠났다
길은 끝없이 멀고 끝은 보이지 않았다
날마다 도보로 걷는 일에 지친 날들을
힘겨워 무수히 쓰러지던 길
어느덧 그 먼 길 다 끝나가고
손 뻗으면 닿을 듯 가까운 끝이 보인다
노을 묻은 회양목 덤불 넘어 햇살 바른 들길
남은 두어 굽이 돌아가면
바로 내가 당도할 나의 마지막 집 한 채
마른 풀밭에 화강암 깎아세운 문패가 보인다
그 먼 길 끝에 서 있는 희망
어느덧 함께 가던 사람 먼저 가서
돌문 세우고 울타리 쳐놓고 기다리는 집
길 끝에 내 희망 남아 있으니
마른 살 훈훈히 춥지 않으리
무서리 하얗게 옥양목 휘장치고
삭신 마디마다 뼈 삭는 소리 들리는 밤에도
이별 1
가야 한다고
가서 젊음의 황야를 갈아야 한다고
미명의 문을 따고 너는 떠났다
분홍빛 발톱 채 굳지도 않은
등에 한 자루 무거운 열망을 지고
지구의 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그날 출발은 지체없이 뜀박질로 오고
이별은 한 순간에 눈썹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십년 아시아의 대도시 수도 서울엔
팔월 삼복에도 눈이 내렸다
충견처럼 기다리는 그 지붕 밑 다락방엔
열리지 않는 녹슨 빗장 하나
스물 다섯 해 잠자던 네 따뜻한 창가에선
수국빛 추억 만발하고
스치면 구석구석 종소리 울리는
기억의 계단에선
먼 일기장의 까만 낙서들이
춤추는 인형처럼 튀어나오기도 했다
지금도 쥐똥나무 그늘 어딘가에 숨어 있을
그 작은 발자욱들, 작은 목소리들,
때없이 내리는 빗발이 되고
때없이 울리는 악기가 된다
이별
그날 떠날 때
내 가슴 반은 무너지고
남은 가슴 반에 그대를 묻었으니
나는 그대의 집이노라
살아서는 멀리 헤어져 서로 떠돌고
한구석 문고리 잠겼던 마음
죽어서 남김없이 다 풀어놓았으니
무시로 빈 가슴 문 열고 들어와 편히 쉬어라
그 산골짜기 외진 길 및 굽이 돌아가면
그대 먼저 가서 터 닦아 세운 집
우리 생애 마지막 집 한 채 거기 있으니
내 희망 또한 거기 가 쉬리라
무너진 가슴 반은 이미 그 곳에 가 있으니
어디서나 지천이던 장미 한 묶음
한 시대 아름다운 동반으로 손을 잡다가
오늘은 내가 한 사발의 피를 쏟고
혼절해버렸다
한 묶음의 장미엔 한 묶음의 가시가
꽃보다 푸르게 눈뜨고 있었다
그렇게 꿈은
깨기 위해 꽃 속에 잠복하고
꽃은 죽기 위해 날마다 벼랑에 피고
피어서 스스로 파괴해가는
쓸쓸한 장례식이 매일 거행되었다
이 가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내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이다
바람 소리 귀 세워
두어 번 우편함을 들여다보고
텅 빈 병원의 복도를 돌아가듯
잠잠히 내 안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누군가
나날이 지구를 떡잎으로 말리고
곳곳에 크고 작은 방화를 지르고
하얗게 삭는 해의 뼈들을
공지마다 가득히 실어다 버리건만
나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지 못한다
나뭇잎 한 장도 머무르게 할 수 없다
내가
이 가을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내 의자에 앉아
정오의 태양을 작별하고
조용히 下午를 기다리는 일이다
정중히 겨울의 예방을 맞이하는 일이다
*방문
먼 후일 ...... 내가
유리병의 물처럼 맑아질 때
눈부신 소복으로
찾아가리다.
문은
조금만
열어 놓아 주십시오
잘 아는 노래의
첫 구절처럼
가벼운 망설임의
문을 밀면
당신은 그때 어디쯤에서
환 - 희 눈 시린
은백의 머리를
들어 주실까......
알듯 모를듯
아슴한 눈길
비가 서리고
난로엔
곱게 세월 묻은
주전자 하나
숭숭 물이 끓게 하십시오
손수 차 한잔
따라 주시고
가만한 웃음
흘려 주십시오
창 밖에 흰 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그런 날 오후에
찾아가리다
사랑아
사랑아
늙지 않아 죽어도 늙지 않아
서러운 사랑아
이천년을 살아도
검은 머리 청청한
머리 풀어 산발하고
벌판을 달리는 젊은 사랑아
이따금
내 가슴 깊은 곳에
몰래 문 열고 들어와
여름바다의 파도로 몰려와
무성영화 시대의
활동사진 틀어 놓고
에덴 동산의
보라빛 도라지꽃
도라지꽃도 피워 놓고
이슬비에 젖은 사월의 새벽길을
수만번 넘어지며 무릎 깨는
사랑아
철없이 늙지 않아
늙지 않아 서러운 사랑아
이천년도 더 산
방부제에 절인 사랑아
나는 죽고
너는 살아
고향의 사과밭
사과나무 가지에
칭얼대는 한 주름 바람으로나
가서 살아라
잉잉대며 날으는 꿀벌로나 살아라
가끔 가끔
돌아보며 생각하는
나는 시방 눈도 없이 캄캄한 타관의 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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