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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술]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과 김혜순 강경호의 시

늘샘 2016. 8. 7. 12:30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과 김혜순 강경호의 시



자화상 Self-Portrait 1901
Paris, Oil on canvas.

<장미빛 시대의 파블로 피카소(1905년)

피카소는 스페인의 남부도시 말라가의 하얀 저택에서 1881년 10월 25일 태어났다. 그 시간, 하늘에는 달과 별들이 신기한 조합을 이루어 하늘이 범상치 않게 밝았다. 그 빛은 신비한 광채를 드리우며 고요히 잠든 마을을 하얗게 밝히고 있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가 태어난 바로 그 시간이었다. 아버지 이름에서 루이스, 어머니 이름에서 피카소를 따온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는 아직 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나이에 크레용을 달라고 해 비둘기를 그렸다. 스페인 내란을 그린 「게르니카」나 한국전쟁을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의 메시지가 말하는 ‘평화’의 상징 비둘기를 그렸던 것이다. 인류를 사랑한 피카소의 미래를 일찌감치 암시하는 작은 출발이었던 셈이다.
피카소에게 닥친 최초의 슬픔은 어린 누이동생 콩셉시옹이 디프테리아로 죽은 일이다. 이 슬픔의 힘을 피카소가 더욱 그림에 몰두 할 수 있게 한다. 장차 맞게 될 청색 시대의 정서가 알게 모르게 몸에 투사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14세 때 피카소는 프랑스와 인접한 바르셀로나로 이사 갔다. 당시 스페인에 등을 돌리고 있던 이 도시를 피카소는 사랑하게 된다. 다시 미술학교에 진학하였지만 마누엘 팔라레스와의 우정이 더 의미 있는 일이었다. 교실에서 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팔라레스의 화실에서 많은 것을 건졌던 것이다.
이후 피카소는 2년 후 홀홀단신으로 마드리드로 떠나게 된다. 왕립 아카데미에서 미술 수업을 한다. 시내 중심가에 작은 방을 하나 빌려 잡고 그림에 전념했는데 땔 나무조차 없는 불기 없는 방에서 먹을 것 하나 변변치 못한 겨울을 나야했다. 언 손을 호호 불며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이후 피카소는 바르셀로나로 다시 돌아왔다. 그곳 중국인 지역에는 2년 전 카페가 하나 문을 열었다. 그곳은 지저분했지만 예술가, 반정부주의자, 시인, 방랑자 등이 모이는 곳으로 그들은 떠들며 즐기면서 밤을 꼬박 새우기가 일쑤였다. 그곳의 골목들은 항상 행인들로 북적거렸고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카페의 천장 낮은 실내에서는 플라멩코 가수들이 부르는 저음의 노랫가락이 울려퍼졌다. 이 중국인 구역에서는 자정이 지나야 문을 여는 카바레, 날카로운 가락과 정열적인 박자의 기타소리, 음악당들, 거리의 여신들……. 때때로 나지막한 홀에서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스페인적이지도 않고 중국적이지도 않은 이 낯선 거리는 피카소가 숨을 쉬고 서식하기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이곳에서 아직 스무 살이 채 안된 보헤미안적 기질을 가진 청년 피카소가 1900년 2월 1일 첫 전시회를 열었다. 좁고 긴 실내의 기름때와 담배연기에 찌든 벽에 150여 점의 작품을 핀으로 고정시켰다. 이곳에서 만난 시인과 음악가 친구들을 그린 크로키였다. 폭 넓은 넥타이, 짧은 저고리, 검은색 모자, 어두운 빛깔의 셔츠, 발목에서 좁아지는 바지 등 카페에 모여 매일 떠들썩한 무리의 복장은 일종의 제복이었다. 피카소는 이 시끄럽고 번잡한 곳에서 이들을 눈여겨 보며 크로키를 했던 것이다. 전시회 이후 피카소는 이 무리들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화를 잘 내고 원만하지 못한 성격을 지닌 피카소였지만 용광로 같은 자신의 욕망을 감추고 침묵하면서 더 큰 먹잇감을 찾아 헤맸다. 이때 만난 친구가 카를로스 카사게마스였다. 카사게마스 역시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예술에 대해 신념이 가득한 청년이었다.

<카사게마스의 죽음(1901년>

피카소와 카사게마스는 그 해가 다 가기 전에 더 넓은 세상, 무엇인가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줄 것 같은, 동경하는 세계를 찾아 프랑스 국경을 넘었다. 파리 행을 감행한 것이다. 당시 파리는 산업혁명 후 급격한 문명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 본격적인 근대 미술 사조인 인상파 바람이 지나간 후 다양한 근대적인 이즘들이 새로운 싹을 피우고 있었다. 특히 자본주의적인 삶의 방식들로 인해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여태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가 자본기술 문명은 물론 사회전반적인 분야에서 활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세기말 분위기가 예술가들을 우울하게도 하고 있었다.
파리의 몽마르트에 입성한 열아홉 살의 청년 피카소는 이 도시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미술관 순례에 몰두했다. 앵그르와 들라크루아, 드가, 로트레크, 고흐, 고갱은 물론, 페키니아, 이집트의 미술품, 조각 작품, 일본 판화에 관심을 가졌다. 새로운 문명과 문화에 눈이 뒤집힐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예술의 세례를 빗발치듯 받으며 피카소는 자신의 예술적 상상력의 영감을 키워나갔다. 서서히 피카소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작은 고통 속에서 싹을 튀었다. 예술적 동지로 친하게 지냈던 카사게마스가 실연사건으로 인해 머리에 권총을 쏜 것이다. 피카소는 자신의 신체 한 부분이 끊어진 듯한 아픔을 느꼈다. 잠시 되돌아온 스페인에서의 일이다.
1901년 봄, 스무 살이 된 피카소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클리시가 130번지에 작은 방을 얻었다. 이른바 ‘청색시대’를 예고하는 「청색 방」의 모델이었다.
슬픔에 빠진 피카소는 「카사게마스의 죽음」, 「관속의 카사게마스」, 「초혼:카사게마스의 매장」 등 젊은 나이로 세상을 버린 비극적인 친구를 추억하는 그림을 그렸다. 아무리 천재적인 피카소라 할지라도 피가 끓는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이었으므로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을 큰 충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친구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미안함과 친구의 죽음에 자신이 일정부분 책임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색을 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정서가 반영이 되어 청색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피카소 예술의 스타트는 슬픔에서 배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때부터 그려지는 그림들은 푸른색조가 주조를 이루게 되어 푸른색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푸른색으로 생각을 하고 푸른색으로 말을 하게 될 정도로 피카소는 온통 청색에 빠지게 된다. 처음에는 청색을 통해 애수와 비탄의 정서를 그림으로 표현하였지만, 그러한 슬픔의 정조에 함몰되지 않고 인간의 삶을 깊이 사색하는 「삶」, 「맹인의 식사」, 「기타치는 맹인」, 「스프」, 「다림질 하는 여인」, 「애도하는 사람들」과 에로티즘 세계를 보여주는 「속치마」, 「포옹」, 「여자친구」 등을 그려낸다. 이러한 작품의 중심에는 말할 것도 없이 카사게마스의 죽음이 있다.


<삶(1903년)>

이들 작품들은 청색시대의 주된 정서인 죽음, 혹은 슬픔, 그리고 삶이란 무엇인가를 되묻는 질문에 대한 피카소의 고뇌가 묻어있다.
피카소의 청색시대에 주목하고 그 무렵의 그림들에 대한 인상과 피카소의 ‘청색시대’가 던져주는 관념을 시로 쓴 시인은 김혜순과 강경호가 있다. 김혜순의 「청색시대」는 피카소의 「삶」을 시로 전이시킨 것이며, 강경호의 「청색시대」는 피카소의 ‘청색시대’(1901~1904)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정서와 그 무렵 피카소의 삶에서 일어난 친구 카사게마스의 죽음을 아우의 죽음과 결부시켜 자신의 감정을 시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먼저 김혜순의 「청색시대」를 읽는다.

파리로 날아가기 전 바르셀로나의 피카소는 청색 시대를 난다
하늘과 바다가 멧돌처럼 맞붙어
갈아낸 푸른 가루가 식구들 위로 풀풀 날린다

오늘 일 끝내고 이불을 끌어올리면
바다를 오래오래 구워
내 뼈를 만들어주신 하나님이
나를 또 바다로 부르시네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바다 나무 한 그루
바다 나무 이파리들이 바다 커튼처럼
커튼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면

저 세월의 바다에 잠긴 내 푸른 사진들
푸른 이끼 퍼진 얼굴이 껴안은 푸른 내 애인

퍼내도 퍼내도 푸른색은 퍼지지 않아
(이불을 들썩거리며 돌아누우며)
누가 저 바다를 꺼다오

수천 개의 수상기들이 철썩거리는 소리
내 애인에게 푸른 옷을 입히는 소리

꺼다오

(내 뼛속 어딘가 그 어딘가 아직도
출렁거리는 바다가 있어
쉴 새도 없이
상영중인 바다가 있어)

피카소는 어떻게 뼛속의 바다를 건너
장밋빛 시대의 암술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그는 어떻게 뼛속의 바다를 건넜을까
-김혜순 「청색시대」 전문

<초혼(카사게마스의 매장, (1901년)>

청색시대에 피카소는 모든 사물을 청색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다. 이는 그만의 독특한 회화양식이거나 기법일 수도 있지만 그가 카사게마스의 죽음에서 오는 충격을 그림으로 형상화 하는데 용이하고 자신의 회화에 대한 어떤 신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푸른색이 주는 색채이미지와 그림의 내용이 결합하여 죽음, 비참함, 인생에 대한 사색 등을 나타내는데 푸른색이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푸른색을 즐겨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실질적으로 청색과 보색 관계인 황색과 적색의 색채감은 열정, 태양, 열기를 표현하는데 용이한 색으로 흔히 인식된다면 청색은 차가움, 음산함, 슬픔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 물론 푸른색을 밝게 쓰는 경우는 쾌활한 이미지와 의미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피카소의 청색시대의 그림은 검은색과 푸른색이 만난다거나 그림의 내용이 죽음, 혹은 비참함, 그리고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을 담는 경우가 많아서 그 정서와 의미가 매우 무겁다.

피카소의 「삶」도 이러한 현실이 적용됐다.
전경에 옷을 벗은 채 여성이 속옷만 입은 남성의 어깨와 팔을 얹어 기대고 있다. 젊은 두 사람은 틀림없이 사랑하는 연인이다. 젊은 남성은 피카소의 죽은 친구 카사게마스의 얼굴로 한때 애인을 사랑했던 그의 모습이다. 그 오른쪽에는 간난아이를 안은 카사게마스의 어머니가 그들을 바라본다. 카사게마스의 미래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다. 아마 이 작품의 배경으로 짐작되는 화실에 피카소가 그리고 있는 그림들이 후경에 펼쳐져 있는데, 위에는 앉은 채로 포옹하고 있는 벌거벗은 남녀의 모습과 아래에 얼굴을 무릎에 파묻으며 고뇌하는 나부의 그림이 보인다. 피카소의 「삶」에 간난아이, 사랑하는 청춘, 그리고 고뇌하는 사람, 어머니를 배치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간의 생로병사를 나타낸 고갱의 그림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고갱이 자살을 시도한 후 그린 이 그림의 주제와 겹쳐지는 피카소의 「삶」은 우연일지는 모르지만 고갱이 5년 전에 그린 그림이기에 피카소가 고갱의 이 그림을 떠오르며 그렸는지도 모른다.

피카소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사랑의 쾌락, 또는 사랑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고자 했을 것이다. 그리고 초췌한 모습의 어머니는 이제 막 시작하려는 부부에게 사랑과 해산, 인생에서 만나는 수난을 말해주려는 듯하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놓인 웅크린 나신은 단독자 인간 존재의 고통스러움을 말해주는 듯하다.

김혜순의 「청색시대」는 ‘푸른’이라는 청색이미지를 매우 강조한다. “하늘”, “푸른가루”, “바다”, “나무”, “푸른 이끼”, “수상기”, “푸른 사진들”, “푸른 내 애인”, “푸른색”, “푸른 옷” 등이 그것들이다. 김혜순은 젊은 피카소를 상징하기 위해 “푸른”이라는 형용사를 생각해냈을 것이다. 이는 피카소 그림 속의 슬픔의 정서를 시언어로 이끌어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첫 연의 “파리로 날아가기 전 바르셀로나의 피카소는 청색시대를 난다”는 스무 살이 되기 전, 프랑스로 떠나기 전의 피카소의 삶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친구의 죽음으로 이미 청색시대가 바르셀로나에서 잉태됐음을 암시한다. “하늘과 바다가 맞붙어/갈아낸 푸른가루”에서 피카소의 젊은 시절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김혜순의 「청색시대」는 피카소의 「스카프를 쓴 여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바닷가에서 떠나는 남편을 전송하는 이 그림은 꼭 김혜순의 「청색시대」와는 상관관계가 없는 듯 하지만 이 그림의 분위기가 김혜순의 「청색시대」의 ‘세상’을 의미하는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김혜순의 「청색시대」의 ‘바다’의 이미지와 의미가 겹치기도 하는 것이다. 특히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바다나무 한 그루/바다나무 이파리들이 바다 커튼처럼”이 실제 피카소의 「스카프를 쓴 여인」의 하늘에 떠있는 구름에서 “몽글몽글 피어오르는”이 연상되고 아이를 안고서 있는 여인의 모습이 한 그루 “나무”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혜순의 「청색시대」는 피카소의 「삶」을 바라보며 형상화 시킨 작품이 분명하다. 피카소의 친구 카사게마스의 사랑 혹은 피카소의 사랑과 삶이 암시되어있는 것이 피카소의 그림이며 김혜순의 「청색시대」이기 때문이다. 즉 “푸른 이끼 퍼진 얼굴이 껴안은 푸른 내 애인”을 나타내는 것이 껴안고 있는 남녀의 이미지와 오버랩되어 있다. 그리고 피카소, 혹은 카사게마스의 좌절과 절망을 나타내는 “퍼내도 퍼내도 푸른색은 퍼지지 않아/(이불을 들썩거리며 돌아누우며)/누가 저바다를 꺼다오”에서 “바다”는 절망적인, 또는 참담한 그들의 삶을 형상화 시킨 부분이다.


김혜순의 「청색시대」엔 “바다”라는 시어가 빈번하게 출현한다. 이 “바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의 시를 읽어내기 힘들다.
그런데 이 작품은 구체적인 어떤 대상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에 “바다”의 의미를 유추하기가 힘들다. 즉 “바다”의 의미가 다의적으로 해석이 가능하기도 하지만 꼭 집어서 “바다”의 의미를 한정할 필요도 없다.
하늘과 바다가 맷돌처럼 맞붙어”에서는 “하늘과 바다가” 맞붙어 있는 상황이 매우 답답하듯 피카소의 힘든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바다를 오래 구워/내 뼈를 만들어 주신 하느님”에서는 “바다”가 고통스러움으로 단련된 공간으로 짐작해 볼 수 있는데, 그러나 뒤이은 시행 “나를 또 바다로 부르시네”를 생각하면 “바다”가 단순하게 공간이나 장소가 아닌 ‘시련’이나 ‘고통’스러움을 의미화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바다 나무”, “바다 커튼”이 ‘시련’이나 ‘고통’을 극복하는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세월의 바다”는 ‘고통스러운 시간’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저 바다를 꺼다오”에서의 “바다”는 지속되는 ‘시련’과 ‘고통’을 나타내는 것이 될 것이다. 한편 “수천 개의 수상기들이 철썩거리는 소리”에서 “수상기”는 “바다”의 다른 이름이 될 것이다. 아마 김혜순이 이 작품을 쓸 무렵 “수상기”는 푸른색의 흑백 수상기를 쓰던 시절이었기에 수상기 화면의 푸른색에서 “바다”를 연상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도 “수상기=바다” 또한 ‘시련’과 ‘고통’을 나타내는 말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뒤이은 시행에서 “내 애인에게 푸른 옷 입히는 소리 꺼다오”라고 한 것으로 이해된다. 화자는 시 후반부에서 “(내 뼛속 어딘가 그 어딘가 아직도/출렁거리는 바다 있어/쉴 새도 없이/상영 중인 바다가 있어)”라고 아직도 ‘시련’과 ‘고통’이 끝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면서 “피카소는 어떻게 뼛속의 바다를 건너/장미빛 시대의 암술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그는 어떻게 뼛속의 바다를 건넜을까”하며 자신도 피카소가 ‘장밋빛 시대’를 연 것처럼 희망찬 미래를 맞고 싶은 의지를 보여준다.

<스카프를 쓴 여인(1902년)>

김혜순의 「청색시대」는 피카소의 그림 「삶」을 바라보며 쓴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피카소의 특정 작품을 보며 시를 썼다고만 할 수 없다. 피카소의 작품세계를 구분할 때 초창기 어려운 시절이었던 1901~1904년 까지를 ‘청색시대’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피카소에게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 시기에 그린 피카소의 그림 세계는 친구의 죽음과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김혜순은 이러한 것들을 ‘청색시대’로 의미화 하고 자신의 삶 또한 이것들과 견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 작품 강경호, 즉 필자의 「청색시대」는 피카소의 특정 작품을 시로 전이시킨 것이 아니다. 피카소의 ‘청색시대’가 보여주는 작품 세계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인 슬픔과 시련, 그리고 고통스러움이라는 관념을 시인 자신의 사적 체험과 견주어 형상화한 작품이다.

청색은 왠지 슬프다
무덤 속 불빛 같고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우울한 토요일 밤
내 화실의 침침한 불빛 같아서
카사게마스의 얼굴과 눈빛이 푸르다
그 시절 나의 밤을 뎁혀주는 것은
오직 푸른 연탄 두 장의 무게였다

그러므로 푸른색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푸른색으로 생각하며 푸른색으로 말하는
청바지차림의 외롭고 가난한 나의 노래는 쓸쓸하다
누군가 말을 붙이면 울 뻔했던 나는
몸을 쥐어짜면 푸른 물이 줄줄이 떨어졌다

그 시절 사당동도 푸르고 종로도 푸르고
카사게마스가 묻힌 해창 바닷물도 푸르러서
캔바스에 푸르게 일기를 써내려갔는데
카사게마스의 무덤에
파랑새 한 마리 떠나지 않고 울곤 했다

슬픈 카사게마스,
그의 무덤에 푸른 꽃을 바치면
이를 악물기 위해 노랗거나 빨간 꽃을 가져오라고 했다
곧 시들어 버리는 꽃에 쉽게 싫증난 그를 위해
마침내 무덤 앞에 살아있는 석류나무를 심어줬다
비로소 산을 내려가는 형의 등 뒤에서 내 아우 카사게마스는
잘 익은 석류를 떨어뜨려 주기도 하고
가을 억새 숲으로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하였다.
-강경호 「청색시대」 전문

 

나의 ‘청색시대’는 군대를 제대하고 서울에서 살 무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우울하고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절은 내가 가장 많은 꿈을 꾸기도 했던 때이기도 하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그동안 내가 읽었던 책들을 짊어지고 쫓기듯 사당동 기독교 잡지사에 들어와 살았다. 남태령에서 부는 겨울바람에 혼자 보내는 겨울밤은 몹시 우울하고 쓸쓸하고 추웠다. 밤을 뎁혀주는 것은 “연탄 두 장”의 무게였다. 가끔 열어본 연탄난로의 불빛이 푸르렀다. 그 무렵 나의 삶을 지탱하게 해준 것은 책 읽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이었다. 그것들만이 나의 존재를 확인해주었다. 많은 것들을 꿈꾸었지만, 그러나 암담하고 우울했다. 그러므로 세상은 모순과 부조리하게만 보일 뿐이었다. “푸른색으로 세상을 바라보고/푸른색으로 생각하며 푸른색으로 말하는/청바지 차림의 외롭고 가난한 나의 노래는” 쓸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보리수 시낭송 모임>이라고 하는 데서 간사 노릇을 했는데 시낭송 작품집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 때 보던 화집을 청계천 헌책방에 팔아 을지로에서 시낭송집을 만들어 독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느날 시낭송회가 끝났는데 동생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객사했다는 것이다. 나는 진저리치며 고향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차창 커튼으로 얼굴을 가리며 서울에서 광주까지 소리죽여 울면서 내려갔다. 이제 막 삽질하는 아우의 무덤을 아프게 밟아주고 그날 밤 술을 마셨지만 취하지 못했다.


<여자친구들(1904년)>

그날 이후 나의 삶은 “푸른 물이 줄줄이 떨어졌다” 다시 돌아온 “사당동도 푸르고 종로도 푸르고” “카사게마스가 묻힌 해창 바닷물도 푸”르렀다. 젊은 날 세상을 떠난 나의 아우와 카사게마스가 내 의식 속에서 자주 겹쳐졌기 때문에 왠지 카사게마스에게 연민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정신을 놓고 사는 부모님이 안 잊혀 고향에 다녀오곤 하였다. 그리고 부모님 몰래 아우의 무덤에 가서 실컷 울었다. 어떤 때는 막내아우와 함께 우리 삼형제가 슬프게 만났다. 한참을 눈물짓다가 둘은 산을 내려오고 하나는 산에 남았는데 뒤돌아보면 아우의 무덤에 “파랑새 한 마리 떠나지 않고” 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우가 죽은 후, 나는 오랫동안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피카소는 카사게마스의 죽음을 개인적인 슬픔으로만 가두지 않고 회화작품으로 승화시켰지만 나는 캔버스를 보면 푸른색이 떠오르고, 슬픔에 젖어 오랫동안 헤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오직 시 쓰기에 몰두했다. 그 세월이 벌써 24년이 흘러갔지만 나는 여전히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아 사무실 2층에 화실을 차려놓고 그림을 그릴려고 하지만 시동이 잘 안 걸린다.
아우가 남긴 고향의 나무들을 이사 다닐 때마다 데리고 다녔다. 이제 우리 집 정원의 석류나무와 소사나무 분재는 아우의 유일한 유품이 되었다. 겨울 눈보라치는 날, 세상이 어둠 속에 잠겨 있을 때 나는 아우의 몸으로 생각하는 석류나무를 쓰다듬는 버릇이 생겼다.
아우의 무덤에 갈 때마다 나는 흰 국화를 바쳤다. 그것이 살아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예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우가 “노랗거나 빨간 꽃을 가져오라고 했다” 물론 나의 의식이 내게 시킨 것이겠지만 나는 아우의 무덤에 국화뿐만 아니라 형형색색의 여러 가지 꽃을 갖다놓았다. 그런데 다시 시간이 흐르자 나의 의식은 살아있는 꽃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해 아예 “무덤 앞에 살아있는 석류나무를 심어 줬다” 그러자 비로소 죽은 아우가 죽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아우가 심었던 석류나무는 우리 집 정원에서 해마다 내게 석류 열매를 선물한다. 그래서 석류나무 밑에 서 있으면 이따금 “잘 익은 석류를 떨어뜨려 주”며 “형”하고 나를 부르기도 한다. 무덤에 갔다가 내려올 때 질질 눈물을 짜던 아우가 이제는 잘 가라고 “가을 억새 숲으로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한다. 이제 내게도 장밋빛 시대가 왔는가, 지나갔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청색시대」는 내 인생에서 가장 춥고 아픈 시절을 노래한 작품이다. 다시 말해 피카소의 ‘청색시대’와 오버랩 되면서 화가 피카소와 화가 강경호의 젊은 시절이 만나는 공간인 것이다.

 

 

 

강경호

(시인, 문학평론가)

청색시대 그림감상



늙은 기타리스트 The Old Guitarist. 1903
Oil on panel. 122.9 x 82.6 cm
Art Institute of Chicago, Chicago, IL, USA.

인생 La Vie (Life) 1903 oil on canvas / Cleveland Museum of Art.



<인생(1903)>은 여러 번의 습작을 거쳐 탄생한 작품이다. 청색 시대 작품 중

가장 대작인 이 작품은 매우 상징적이다. 사랑과 출산 이 모든 인생의 황금기가

실은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 그림은 친구 카사게마스와 그의 연인, 그리고 아이를 안고 있는 어머니가 그려져 있다.

인물들의 표정은 여전히 우울해 보이나 카사게마스가 왼쪽 다리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왼쪽 손가락 하나를 위로 올리고 있는 모습은, 패배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피카소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일생동안 지속된다.

피카소는 이러한 경험으로 육체적 사랑의 허무함을 담은 [인생]이라는 작품을 그린것으로 추측된다.

구도에서 인물들이 적어도 두 번 바뀐 이 작품을 위해 피카소는 4장의 스케치를 했다.

망또를 걸친 여인은 처음에는 턱수염이 난 남자였다.

남자의 경우, 원래는 피카소 자신의 자화상으로 그려졌지만 나중에는 그의 친구인

카사헤마스의 얼굴로 변했다. 카사헤마스는 피카소의 동료화가로

애인 제르맹의 변심때문에 자살한 사람이다.

남자에 기대있는 여인이 제르맹으로 여겨지며,

아이를 안고있는 여인은 케사헤마스의 어머니이다.

양쪽 인물들의 사이에 보이는 배경의 위쪽에 그려진 그림은 고갱풍으로 그려졌으며

아래쪽 여인은 고호풍으로 그려졌다. 그의 청색 시대의 주요한 모티브인

남녀간의 육체적 사랑과 모성애를 통해 인생의 단면을 그려내고 있다.

 

 

The Tragedy 1903 oil on wood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방문 The Visit (두 자매Two Sisters) 1902 Oil on canvas pasted on panel.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장님의 아침식사 Breakfast of a Blind Man. 1903 Oil on canvas.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USA.

젊은 여인의 초상화 Portrait of a Young Woman. 1903 Oil on canvas pasted on cardboard.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L'ascete. 1903 Oil on canvas. Barnes Foundation, Lincoln University, Merion, PA, USA. 소년과 늙은 거지 Old Beggar with a Boy. 1903 Oil on canvas. The Pushkin Museum of Fine Art, Moscow, Russia. 너울 쓴 마돈나 Madonna with Garland 1904 Private collection / Painting Height: 63 cm (24.8 in.), Width: 48 cm (18.9 in.) 母性 Motherhood 1901 Private collection / Painting - oil on canvas Height: 92 cm (36.22 in.), Width: 59.7 cm (23.5 in.) 母性 Motherhood 1901 Private collection / Painting - oil on canvas Height: 47.4 cm (18.66 in.), Width: 34 cm (13.39 in.) 詩人 사바테스 The Poet Sabartes 1901 Oil on canvas Portrait of Sebastià Junyer i Vidal, 1903


 

압셍트 여성 애주가 The Absinthe Drinker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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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화 목 한 사람들
글쓴이 : 閔在鏞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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