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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 작품에 나타난 수필시학의 실제 - 서사 / 최원현

늘샘 2018. 7. 7. 23:21


내 작품에 나타난 수필시학의 실제

- 서사

최원현

수필에서의 서사는 특히 나 같은 감성 수필을 주로 쓰는 수필가들에겐 늘 큰 숙제처럼 부담되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수필에서의 서정과 서사는 별개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어울림으로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서정수필과 서사수필로 나눌 수 있지만 서정 속에 서사가 없을 수 없고 서사 속에 서정이 없을 수 없는 것이 수필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연수필軟隨筆, 경수필輕隨筆을 서정수필로, 중수필重隨筆, 경수필硬隨筆을 서사수필로 구분하기도 하고 에세이적인 수필을 서사수필이라 하면서 사회문제와도 고리를 가지려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수필에서의 서사란 꼭 육하원칙적 사건의 이야기로만 보기는 어렵다. 수필이 체험적이고 과거 회상적이어서 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서사적이라 함은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주관성을 개입시키지 않고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전하는 형식이다. 일반적인 우리 수필들이 대부분 자기 이야기를 서정적 관점으로만 그려왔기에 정적이라며 서사성의 부족을 말하지만 그 또한 서사적인 것이 전면 아니라고 말할 순 없다.

내 경우 수필의 주제는 그리움이 많다. 그리움은 서정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걸 그리움이라는 서정으로만 보기보다는 그리움이라는 서사로 써 본 것들이 여럿 있다.

서사의 사전적 의미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적는 것시간 흐름에 따라 일어난 사건에 대한 서술이다. 그것이 사람의 이야기로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면서 시간적 흐름으로 전개되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주인공의 활동이 시간과 의미를 갖는 진행을 이루면서 그 이야기 안에서 의미화(주체화)가 이뤄진다는 점이다.

이때 그 줄거리를 중심으로 한 연결들이 의미를 만들어낼 때도 이야기가 있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화자)이 있는 서사구조가 된다. 실제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작가 본인(1인칭)일 수도 있고 그(3인칭)가 될 수도 있지만 서사 수필의 특징은 화자가 실제작가인 나와 동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대개 일인칭으로 서술된다. 수필이 자전적 형태를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1) 볼록볼록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까아만 바위들은 그대로 살아있는 모습이고, 그들은 쉬익쉬익 날기를 뽐내는 갈매기들과 장난까지 치는 것 같다. 그러나 가만히 바라보면 바위들은 무수한 생명의 보금자리처럼 보인다. 바다는 거대한 어머니가 되어 무수히 많은 유방을 내놓고 젖을 먹이고 있는 모습이다. 알맞은 따스함과 시원함으로 마음을 정갈하게 해 주는 곳, 바라보고만 있어도, 그냥 아무데나 앉아만 있어도 편안한 마음이 되는 곳, 귀가 열리고 눈이 열려 자연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고, 저 속 깊은 곳에서 노니는 바다 식구들까지 환하게 볼 수 있는 곳, 이곳에 있으면 사람과 자연이 아주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어버릴 것 같다. 본시 사람도 자연의 일부가 아니던가.

- 어머니가 보이는 강(2)-느낌표 여행부분

 

(2) 얼마나 내려왔을까. 내린천이 길게 펼쳐져 있는 계곡, 차를 대기에 좋은 한 곳을 잡아 차를 멈추고 냇가에 자리를 잡았다. 맑은 계곡 물에 손을 담그니 그 차가움이 순식간에 여름을 잊게 만든다. 모래와 모나지 않은 돌들이 평평한 분지를 이룬 곳에서 우린 준비해 간 음식을 꺼내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 너무 차가워 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작은아이에게 보란 듯 입은 옷 채로 물속으로 들어갔더니 생각만큼 차갑지는 않다. 아마 내려 쪼이는 햇살 덕분에 이만해진 것 같다. 휴가철이 갓 지난 후여서 인지 인적이 끊긴 계곡에서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와 풀 향기를 맡는다. 자연의 소리, 자연의 내음은 언제 들어도 싫지 않고, 언제나 향기롭다.

- 어머니가 보이는 강(2)-돌아오는 마음부분

(1)(2)는 여행길에서 그냥 바라보이는 정경이요 상황 같아 보이지만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전제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바다가 보이는 곳을 지나 강이 보이는 곳으로 향하는 길에서 어머니란 그리움의 대상으로 좁혀나가는 과정이다. 거기서 보여 지는 자연 곧 계곡 물 바위 나무 물소리 바람소리 새소리 풀 향기까지를 모아 그리움이란 대상으로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

 

(3) 처음엔 삐걱삐걱 노를 젓는 배였다. 그래서 비가 와서 강물이 많이 불었거나 물살이 조금이라도 세어지면 물살 약한 이 편 강가의 위쪽으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흐르는 물살을 이용해 건너편으로 엇비슷이 가로질러 건너곤 했었다. 그러던 것이 모터를 단 통통선으로 바뀌자 사정이 조금 좋아졌다. 웬만한 물살은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마력 되지 않는 작은 배인지라 물살이 드세 지면 배는 여전히 파도의 높이만큼 치솟았다 내려왔고, 그렇게 한 번 떠올랐다 내려오게 되면 대개는 통통대던 기관이 멈춰져버려 배는 흐름을 이기지 못한 채 이내 저만치 아래쪽으로 떠내려가곤 했다. 배가 한 번 튀어 오를 때마다 일어난 물보라가 나들이 길에 곱게 차려입은 옷에 튀기면 울상을 짓는 모습이 참 안되어 보이기도 했지만 어린 나는 그런 모습이 또한 재미있어 소리를 죽여 가며 쿡쿡 웃곤 했었다.

- 어머니가 보이는 강(3)-신설포의 추억부분

 

(4) 바다가 아닌 강, 어머니는 항상 강이 되어 내 가슴속을 흐르고 계셨다. 어머니는 강물소리로 내 귀에 이명처럼 나의 이름을 불러 주셨다. 그렇게 얼마동안 강둑을 내달리다 보면 저만치서 어머니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어머니는 늘 까만 무명치마에 하얀 옥양목 저고리 차림이셨다. 언제부턴가 다리가 불편하셔서 먼길을 걷기가 힘드셨다는 어머니, 그래서 어머니는 지팡이 대용으로 쓸 수 있는 나무 막대를 짚고 다니셨단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저만치서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 어머니가 보이는 강(3)-신설포의 추억부분

 

(5)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얻은 홧병이 폐렴을 몰고 와 폐결핵으로 깊어지고, 혹여 자식에게 전염이라도 될까봐 그토록 모질게 나의 접근을 막으셨다는 어머니. 내 위의 형이었던 큰 아이를 잃었고, 이제 하나 있는 자식인데 얼마나 안아보고 싶고, 안아주고 싶으셨을까만 당신이 숨 쉬어서 깨끗지 못한 공기라도 되어 행여 내게로 갈까봐 처소를 엄격하게 격리하셨다는 어머니, 어머니는 그래서 나쁜 것, 병 될 만한 것은 공기까지라도 다 당신이 마셔 버리고, 대신 그 가슴에서 걸러져 정갈하게 정수된 맑은 가슴 강물로만 내게로 흘러가게 하셨던 것이다.

- 어머니가 보이는 강(3)-신설포의 추억부분

 

(3) (4) (5)는 강과 어머니를 신설포라는 작은 나루를 통해 이야기로 생성해 가고 있다. 있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움직임 곧 시간의 흐름과 연계된 상황으로 붙들어 형상화하고 의미화 하려는 정황이다.

 

(6) 책을 펼치니 세미한 향기가 풍겨난다. 책갈피 사이에 눌려있던 은방울꽃에서 나는 향기다. 새삼 그날의 햇볕과 바람까지 향기로 살아나는 것 같다. 그랬다. 그 날은 참으로 맑고도 밝은 날이었다. 바람까지 살랑대어 기분 좋게 가을 내에 흠씬 젖게 했다. 눈앞으로는 황금들녘이, 들녘 끝으로는 아슴하니 바다가 보였다. 어머니가 계시는 곳, 어머니 묘소의 벌초를 하던 날이 보랏빛 여운을 안은 채 책갈피 속에서 눌린 은빛 꽃으로 싱긋 웃고 있다. - 어머니의 노래(1)부분

 

(7) 어머니 앞에 선다. ‘어머니, 1년 만에야 단장을 해드리는 군요.’ 어머니는 여전히 말이 없으시다. 어머니 산소의 벌초는 내게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바로 어머니와 가장 가까이 만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계를 쓰지 않고 늘 낫만으로 벌초를 해 왔었다. 그런데 지난해 벌초를 한 후엔 크게 앓았다. 벌써 나이 탓일까. 그래서 이번엔 더럭 겁부터 났다. 그렇다고 그것마저 남에게 맡길 순 없었다. 해서 금년엔 예초기를 빌려왔다. 어머니도 내 그런 마음은 용서해 주시리라. 그렇게 빌려온 예초기를 막 작동시키려는데 묘소 머리맡에 때 아닌 은방울꽃이 피어있다. 가녀린 몸매에 여섯 개나 방울을 달고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은방울꽃은 5년은 되어야 꽃이 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참으로 신기했다. 여름께에 다녀갈 때만 해도 보지 못했는데 그것도 제 피어날 때를 한참이나 지난 지금에 어떻게 이렇게 피어나 나를 보고 있는 것일까.

- 어머니의 노래(2)-또 하나 그리움의 소리부분

 

(8)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흑백사진 속에서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실제도 희고 검은색이었는지는 모르겠다)로만 살아있다. 그런데 오늘 어머니의 산소에서 은방울꽃을 만나고 나니 다른 분위기의 어머니가 연상된다. 은방울꽃은 은은한 은색이다. 어머니가 정작 좋아하셨던 색깔도 이런 은색이었을까. 그렇다면 50년도 지난 지금에 와서야 왜 새삼스레 내게 당신의 색을 알리고자 함일까. 그러고 보니 그냥 피어난 꽃이 아니라 너를 위해 피워낸 꽃이라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어머니의 노래(2)-또 하나 그리움의 소리부분

 

(6) (7) (8)은 되돌릴 수 없는 그리움의 실체를 현재에 재현 시켜 서사화 한 것이다. 상상이 아니라 재현으로 현실에 불러온 것이다. 세상에 없는 어머니가 은방울꽃으로 내 눈앞에 나타나고 그 꽃의 향기가 어머니의 체취로 내게 다가오게 하는 것, 그리고 벌초를 하는 과정이 어머니와의 대화가 되는 것, 흑백사진 속 어머니의 옷 색깔이 은방울꽃색이라고 말해오는 것들이 단순히 사건적 구현이 아닌 재생적 현실에서 보여진다. 과거 지향적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서사성을 추구해 본 것으로 수필의 서정적 서사성, 서사적 서정성을 가능케 해 보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크게는 모든 흐름이 그리움이란 주제로 향하게 했다. 이처럼 내 수필에서의 서사는 서정과 완전히 다른 것이 아니라 서정의 서사로 수필을 더욱 맛깔스럽게 만들고자 했다. 따라서 감성적이면 다 서정적인 것이 아니라 수필에서의 서정과 서사는 서로 어울림으로 수필을 더욱 수필답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최원현1987한국수필로 수필, 2009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문학상, 조연현문학상, 신곡문학상대상 등 수상.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 󰡔그냥󰡕 17, 문학평론집 󰡔좋은 수필 쓰기와 바르게 읽기󰡕 󰡔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

    


출처 : 한국동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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